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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권 장외인간 -이외수/해냄

천이형님2005.11.11 09:51조회 수 178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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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 사보에 내가 실었던 글.

“죽을 것 같은 치열함 벗어나, 구원의 문학으로”
이외수 신작소설 ‘장외인간’

원고지 한 장에 목숨을 거는 사람

밥을 굶은 지가 며칠 째인데다, 방세도 몇 달째 밀려 내일이면 쫓겨날 25세 청년이
있었다. 휑한 방 한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원고지 한 뭉치. 현상공모에 도전
하겠다던 친구가 흘리고 간 것이다. 당장 굶어죽을 판이었던 청년은 소설이라도 써
서 어떻게든 목숨만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원고지 첫 칸에 무작정 ‘춥다’라고 썼다. 그런데 그 문장은 하나도 안 추워 보였
다. 밖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영하의 날씨. 추운 게 무엇인지 직접 피부로 느끼고 싶
던 청년은 외투를 벗고 알몸으로 나갔다. 몇 시간 째 눈을 맞으며 서 있던 그는 방으
로 들어와, 끌로 새기듯 조심스럽게 한 문장씩 원고지를 채워나갔다. 예수가 태어날
때처럼 매서운 추위를 보였던 그 밤은, 백수 청년 이외수가 소설가로 탄생하던 날이
었다.    

40장 원고를 위한 1600장의 파지

이날의 중편소설 <견습어린이>로 강원일보 신춘문예 등단을 한 소설가 이외수. 상금
으로 다행히 하숙비와 외상값은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설가가 되었다는 책임감
은 그를 옭매었고, 문장을 위한 본격적인 그의 노력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바람의 파이터’ 최영의가 입산수도했던 비장함처럼, 이외수는 글을 날카롭게 단련하
기 위해 맨몸으로 산을 찾아간다. 그는 수년간 생살을 부딪치며 문장을 갈고 닦는 정
진을 거듭했고, 이후에 속세를 다시 찾는다.
이외수는 글을 쓸 때, 한 솥단지 밥을 해놓고는 밖에 내놓는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
기 위해 하루에 한 끼씩, 그야말로 ‘땡땡’ 얼어붙은 밥을 망치와 못으로 깨먹으며 그
는 글을 써내려갔다.
소설 <벽오금학도>를 쓸 때는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다. 교도소의 철문을 직
접 만들어 열쇠로 잠그고, 그 안에 칩거하며 4년을 견뎌갔다. 물론 밥은 죄인처럼 식
구통을 통해 먹었다. 고치고, 또 고쳤다. ‘은/는/이/가’ 조사 하나를 붙잡고 밤을 새는
그는 보통 40장의 원고를 쓰려면 1600장의 파지가 필요했다. <들개> <칼> <벽오금
학도> <황금비늘> 등 날이 살아있는 묘사, 펄펄 끓어오르는 문장들은 이런 목숨을
건 노력을 통해서 탄생됐다.    

신작 ‘장외인간’

그런 이외수가 <괴물> 이후 3년 만에 칼을 뽑았다. 7번째 장편소설 <장외인간>은 출
간한지 이틀 만에 1억원이 넘는 빚을 갚게 했고, 한 달 만에 30만부가 넘게 팔렸다.
이외수의 이번 소설은 ‘갑자기 달이 사라져버린다’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바다에
서는 해파리 떼가 사람을 공격하고, 육지에서는 메뚜기 떼가 농작물을 습격한다. 주
인공 ‘헌수’는 달을 기억하는 유일한 인간이지만 정신병자로 취급받을 뿐이다. 그가
기억하는 달은 백과사전과 인터넷, 달력에서조차 찾을 수 없다.
달이 없어서일까. 물질만능 주의에 깊이 잠식된 사람들의 세계에선 초등학생이 양주
를 마시고, 권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낭만으로 상징되는 ‘달’이 없어진 세계를 견딜
수 없던 주인공은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 세상과의 격리를 꿈꾸기도 한다.

이제는 산책을 하고 싶은 걸까.

오랜 기간동안 엎드려 글을 쓰던 습관 때문에, 허리가 완전히 망가진 이외수는 언제
부터인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채팅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달라진 환경 때문이었
을까. 이번 소설에는 ‘초딩’과 ‘리니지’ 등 네티즌들이 사용하는 소재들이 곳곳에 등장
한다.
허나 그의 유쾌한 시도는 나긋나긋한 현대어로 번역된 경전처럼 조금 어색하다. 들개
의 이빨을 가지고 거칠게 문장을 물어뜯던 이외수는 이제 초식동물이 되어버린 걸
까. 이외수의 옛 소설들은 첫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숨 가쁘게 전력질주를 했다. 허
나 소설 <괴물>에 이어 <장외인간>은 산책을 즐기는 듯, 방만한 구성으로 느린 걸음
을 걷고 있다.
“요즘에는 달에 있는 생명체와 실제로 교신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외수는 이제 스스
로와 타인에게 너그러워진 것 같다. 최근 들어 화천지역에 ‘감성마을’을 만들어 지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준비한 것도 이런 행보를 반영하는 듯하다.
“정의에 매달렸던 청년 시절과는 다르게 앞으로는 ‘구원의 문학’을 추구하겠다”던 그
의 말에 공감이 간다. 허나 치열했던 이외수의 소설을 읽고, 함께 분투하던 가난한
옛 독자들은 뭔가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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