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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권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 배창환/ 창비

천이형님2002.11.10 08:52조회 수 546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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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이야기"


며칠 전 부터 이 시의 초입부분만을 계속 되내이면서 다녔다.


누가 쓴 시인지 어느 시집이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못하다가


오늘 우연찮게 찾아냄-


그들이 1990년대의 학생운동을 추억하듯,


그 열렬하면서도 장엄한 실패를 추억하듯


내가 지난 몇 년간을 비슷한 눈으로 바라보게 될줄은 몰랐다.


어떤 이들은 떠난다. 그들은 굵직한 변명들을 찾아 내는 기술도 지녔다.


잊을 것은 잊어가며, 지울 것은 지워가며


조용히 몸을 빼는 세련된 사람들앞에서


멍하니 서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뱉었던 말을 기억하는 것 뿐이다.


참으로, 이제는 더 넓은 의미의 동역을 준비할 때인지도 모른다.




...................................................................................................................................

우리는 대장정에서 낙오된 전사가 아니었다. 자본의 총공세 앞에


퇴각 명령을 받지 못한 초병이었을 뿐, 거대한 해일이 골짜기와


들판을 삼켰을 때, 우리가 지키던 낡은 참호는 고립된 섬으로


떠올랐다. 우리는 갑자기, 자기 땅에서 유배된 사람처럼, 낯설어진


풍경 앞에서 숨을 죽였다.


동굴로 숨어들자 적막이 왔다. 전사에게 젖을 물려주었다는 호랑이는


자취도 없었고, 우리에겐 베고 누울 전선도 움켜줠 그 무엇도 없이,


오직 살아 있는 것만이 결전이었다. 기난긴 밤을 무서운 허기와 갈증,


어둠과 싸우면서 가장 그리운 것은 아득히 먼 곳에서 우리를 불러내던


별이 아니라, 사람의 마을, 꺼질 듯 이어지는 반디 같은 불빛이었다. 이윽고


각개약진으로 산을 내려와 거대한 불야성 아래 몸을 숨길 무렵, 우리는 벌써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이곳은 또다른 전쟁터였다. 적은 어디에도 없었고 어디에나 있었다.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었지만, 가장 강퍅한 적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암세포처럼 자라고 있었다. 그 길에서 우리는 마침내 사람 아닌 것들이


남김없이 저녁놀 바람 속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쓸쓸하고 장엄한 광경을


보았다.


그렇게 1990년대도 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지도에 없던 전선이


아니라, 사람을 이어주는 손바닥 같은, 가을 하늘이 무심코 보내주던


따뜻한 낙엽과도 같은, 작고 작은 깃발이었다.


오늘 시장 아파트 촌락의 창틀마다 불이 켜진다. 여기 또 저기, 우리가


파고 섰던 그 시절 참호의, 저 무수한 깃발,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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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권 선다 싱을 만나다 /ivp (by 천이형님) 제 18권 마케팅 불변의 법칙/알 리스, 잭 트라우트 공저/십일월출판사 (by 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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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2002.11.12 00:03
    어쩌나 어쩌나... 혼란스럽습니다... 무척이나... 저는 굵직한 변명조차 내놓치 못한채 그냥 모든 것을 저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 2002.11.13 10:26
    굵직한 변명을 되뇌이며 스스로도 속아버리지 않기를. 다만 솔직하기를..
유천
2000.02.17 조회 470
첨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