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마포구민 체육시설을 달렸다. 무릎에 고질병이 있는 나는, 집에서 꽤 먼데도 우레탄이 깔린 이곳을 찾는다. 새벽이라 그런가. 발끝을 톡톡 두드려 봤는데 바닥은 아직 딱딱했다. 준비한 골전도 이어폰을 끼고 나이키런클럽 앱을 연다.
나는 상냥한 목소리의 아이린 코치와 함께 달린다. 목소리가 무척 매력적이어서 항상 궁금했는데, 지난달 나이키 지면광고에서 그녀의 실물을 확인하고는 그냥 사무적인 감정만 남았다. 오랜만의 달리기. 인터벌 러닝이 부담이 없을 것 같아서 35분 코스를 선택했다. 10K러닝 5K러닝 마일러닝을 섞어 달리고 중간중간 1분의 휴식시간을 준다. 거리가 짧을수록 에너지를 폭발시켜야 하고 긴거리는 호흡을 조절하는데 중점을 둔다.
아이린은 홀리는 목소리로 조금만 더 달리라고 해놓고서는, 다 끝난 것처럼 말하다 또 달리라고 한다. 그녀는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에선 쌍욕이 튀어나왔는데, "여러분의 환호소리가 들리는데요~"라며 위트있게 받아쳤다. 이런 센스가 좋고 섹시하다.
돌아와서는 간단히 세수하고 요가시간을 기다렸다. 일요일에는 보통 인요가를 한다. 인요가는 음(-)의 요가인데 몸을 이완시키는 요가를 하고 있으면, 일주일간 곤두 서 있던 정신을 끌어 당기는 느낌이 좋다. 달달달달 다리를 떨고 있는 마음이 차분하고 나른해진다. 실제로 몇몇 사람들은 코고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한시간이 미끌어지듯 지나간 뒤, 내 허리처럼 쭈욱 펴졌던 매트를 말아서 제자리에 꼽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능숙하게 몸을 제끼던 앞열 여자수강생은 주차장에 서서 길게 담배를 뿜어제낀다. 이 한까치의 담배가 얼마나 생각났을까. 누구나 자기만의 수련방법이 있는 셈이지.
원래는 스포츠마사지 배우던 사람들과 점심을 하려고 했다. 며칠전부터 한 약속인데, 막상 내가 간다고 하니, 한분이 일정이 있다고 해서 취소됐다. 오히려 좋아. 잘됐다 싶었다. 사실 이 학원은 두달까지는 재수강을 할 수 있어서 수업을 들어도 좋지만, 사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 강사 아저씨의 스타일이 맘에 안들어서 피했다. 게다가 오늘은 그의 마지막 강의날. 끝도 없이 자기 사업 이야기만 늘어놓을 것이 뻔했고, 역시 그랬다고 한다. 수강생들이 들어오는 단체톡방이 있는데, “이제 6년간의 강의를 종료한다”고 하니 다들 큰절을 올리며 그간 감사했다고 줄줄이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는 "그런 식으로 불성실하게 강의하지 말라"고 따금하게 불평을 해야하는데, 혹시나 자기한테 돌아올 불이익을 생각하면서 참는다. 무작정 칭찬을 하는 것도 무작정 참는 것도 다 무력하게 학습된 어른들의 스타일이란 생각이 든다.
오후에는 집에서 빈둥거렸다. 요즘은 나 자신을 밧데리가 자주 닳는 낡은 휴대폰이라 생각하고 필요할 때마다 충전을 해주자는 생각을 한다. 마루에 이부자리를 두껍게 펼치고 모바일 게임을 하며 뒹굴거렸다. 평소 같으면 마음이 무겁고 한심했을텐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we play>는 캐주얼 게임을 찾아서 주물럭대봤다. 세상에나!! 이제는 음성으로 하는 게임도 생겨났다니. 나는 음소거를 했지만, 마이크를 켜놓은 상대편에서 "그것봐! 내 수만 보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탄식의 혼잣말을 하거나, 자기랑 놀자고하며 징징대는 꼬마 동생의 목소리까지 그대로 노출시켰다.
내가 좋아하는 <라이어게임>방에도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목소리가 우락부락한 경상도 아저씨 때문에 좀 긴장을 했다. 아저씨는 쌍욕을 섞어가며 말했다가 노래를 불러가며 설명하다가 혼자 신명이 났다. 하지만 범인을 찾는 이 게임에서 추리하는 족족 틀린답을 말했는데, 자기 말로는 전직 형사라고 한다. 엉뚱한 사람 잡아다가 법정에 몰아세울 스타일이었다. 어쨌든 "이제 그만 교회를 가야한다"며 자리를 뜰때까지 그 방의 웃음 버튼이 되어주었다. 아저씨가 사라지자 방은 활기를 잃었고 나도 눈치를 봐서 슬그머니 종료버튼을 눌렀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낮잠으로 이어지던, 평화로운 오후였다.
4시쯤 낮잠에서 깨어났다. 휴일이면 6시에 마감하는 헬스장에 허겁지겁 뛰어 올라갔다. 사람들은 악착같이 운동하고 있었고, 기구에는 자리가 거의 없어서 루틴이나 순서에 상관없이 나도 마구잡이로 해제꼈다. 아침에 달린게 역시 무리였나. 오른쪽 무릎의 심상치 않은 통증에 성질이 난다. 등산까지는 가능해도 달리기는 역시 욕심인가보다. 윗몸일으키기 100개를 마지막으로 하고나니, 몸에서 꼬랑내가 나는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엔 방송에 사용할 플래카드 두개를 인쇄집에 가서 챙겼다, 갈갈이 박준형 10주년 축하 현수막과 초대석 신문희의 것이다. 현수막 잘뽑혔네. 내일은 대곡 '아름다운 나라'를 실제로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설레였다. 손에 짐이 많았지만, 슈퍼에도 들렸다. 휴일 한끼는 제대로 먹고 싶다는 생각에 까나리 액젓과 배추 한통을 샀다. 집에서 짜파게티를 끓이고 파무침도 곁들일 생각이다.
사이좋게 수다를 떨며 요리를 하다가 어머니 모시는 얘기를 하니 급하게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아내가 농담처럼 반대하는게 이상하게 더 서운하다. 엄마의 고독같은 건 말장난으로 할 얘기가 아니라는 반발감이 들더니, 나혼자 생각이 깊어졌다. 아내는 내 눈치를 살폈다. 이런 이야기를 괜히 심각하게 해서 분위기만 험학하게 하지 말고, 주말엔 어머니를 좀 모셔오고 아내에게도 기분 좋게 설득하자는 마음으로 작은 결론을 내렸다. 내가 더 부지런해야 한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는지 찬바람을 쐬고 동네 편의점에서 쓰레기들을 몇개 집어왔다. 메가톤바와 비비빅을 먹고, 고구마형 과자도 산적처럼 우걱우거 씹었다. 내 몸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게 느껴졌다. 아까했던 윗몸 일으키기 100개가 수포로 돌아가는게 아까웠지만, 어제는 그런 날이었다. 이런 뗑깡은. 우리 엄마의 모성애를 거두지 못하는 불효자의 애도의 표시였지만. 이모저모로 내가 한심한건 어쩔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