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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재밌어졌다. '더이상 참지 않겠다. 할말은 하겠다'며 정면승부할 태세를 밝히더니만 실제로 따박따박 대꾸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응원을 하고 싶어진다. 이전까지만해도 대통령이라면 바둑의 포석을 세우듯 말을 세워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말조심을 못한다. 대체 물밑작업이나 대책도 없어보이는 저 나이브한 스피치 기술이야말로 진정한 자질 미달이다'이라며 한심하게 여겼다. 하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 말해도 왜곡시켜버리는 일간지들에 대해서, 마치 똑똑한 초등학생처럼 하나씩 대답하는 모습이, 비록 國夫로서의 어른스러운 태도는 아니라할지라도 슬그머니 열광하게 만든다.

이번 싸움은 노대통령의 4년 연임제 발언으로 시작됐다. 우선 야권은 일제히 '개헌논의는 정략적인 발언'이라며 지탄을 해댔다. 이에 대해 노대통령은 '4년 연임을 반대하는 세력이야말로 정략적'이라며 꽤 쓸만한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4년 연임제 발언에 대해 박근혜도 "참 나쁜 대통령"이라며 짧고 시큼하게 노무현을 비판했지만 어젯밤 노대통령은 이 말에 대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을 추진한 이승만 대통령, 3선 개헌을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유신헌법을 제정한 박정희 대통령, 단임제이지만 7년 임기를 누릴 수 있도록 개헌한 전두환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이냐"고 따진 것이다.

어짜피 버릴 것 없는 야당은 늘 아전인수격으로 상대방을 비난하지만, 노대통령은 단단히 결심하며 누가 흙탕물인지 보여주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그야말로 꽤나 관전하기 좋은 난타전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중앙일보에서는 이 말들을 다시 왜곡해 '그저 시끄러운 대통령'의 이미지로만 보이게 했지만, 언젠가 전모를 깨닫기 시작하는 백성들이 나쁜놈과 더 나쁜놈을 구별하기 바랄 뿐이다.      
  • 이원석 2007.01.20 10:25
    그러게요.. 조중동 패러디 보다가 뒤집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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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나쁘지 않은데..

춘천까지만이라도 자전거 여행이라..좋아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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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Q&A > 여행, 레저 > 국내여행 > 강원도  
서울 강남에서 춘천까지 걸어서 가려고 합니다

cho50000
조회697 답변3
답변이 완료된 질문입니다. (2005-04-01 04:25 작성)

서울에서 춘천까지 친구들과 걸어서 가려고 합니다.

경험이 있으신 분들의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가는 코스와 대략적인 소요 시간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는 도중 추천할 만한 들릴곳도 부탁드립니다.

가능하면 코스에서 벗어나지 안고 들릴 만한곳이요^^



가는 코스를 좀 자세히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 서울 강남에서 춘천까지 걸어서 가려고 합니다
san5379 (2005-04-02 12:43 작성)

질문자 평
감사^^

강남에서 춘천까지 도보여행

강남에서 천호동을 거쳐 하남으로-.

하남에서 팔당대교를 건너 팔당댐옆을 지나 능내.

다산정약용유적지를 지나 게속 직진-.

양수교북단을 지나 수종사입구를 지나면 서울종합촬영소 입구-.

북한강을 끼고 가다보면강변유원지, 새터유원지입구.

철길을 건너 우측으로 가시면 대성리.

아침 일찍 출발하여

빠르게 가신다면 첫날이니까 대성리까지는 무난할겁니다.



다음날

대성리를 출발 청평을 거쳐 청평검문소 삼거리-상천-상색-가평.

가평을 지나 경강역으로 내려서서

북한강변길로 강촌리조트입구를 지나 강촌역.

강촌에서 둘째밤.



강촌역에서 강촌교을 건너 우측길로 등선폭포입구를 지나면 의암댐.

의암댐을 건너 계속 가시면 춘천시내 공지천.



강남에서 춘천까지 85Km.

평지길 1시간에 4Km로 걷는다면 20시간이상걸립니다.




re: 서울 강남에서 춘천까지 걸어서 가려고 합니다
italy91 (2005-04-01 10:14 작성, 2005-04-01 10:15 수정)

서울- 춘천 도보여행이라..

저도 자전거여행과 도보여행을 많이 생각해왔던것이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서울 강남- 춘천까지 거리가 100KM 조금 넘을 것입니다.

강남- 천호동까지 걸어오신후 천호대교를 건너세요.
천호대교를 건너면 경기, 구리시 쪽으로 가는 길로 접어드세요.
그럼 워커힐쪽으로 지나가게 됩니다.
조금 가시다 보면 두 갈래길이 있는데 쭉 가면 구리시이고 옆으로 빠지면 덕소쪽으로 빠지는 길입니다.
쭉 가셔서 구리시쪽으로 가세요.
계속 가시다보면 정말로 큰 사거리가 (덕소방향, 망우방향, 서울방향, 광릉방향) 하나 나오는데 그쪽에서는 덕소방향으로 빠지세요. 덕소방향으로 계속 가시다보면 3거리가 나옵니다.
(춘천방향, 덕소방향, 서울방향)에서 춘천방향으로 빠지세요. 그곳에서부터 경춘국도의 시작인데 그곳으로 쭉 가시다 보면 춘천으로 가실수 있습니다.

중간에 도착지가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등지이며 대성리와 청평과 강촌은 MT촌으로 유명하고 가평에서는 남이섬 강촌에서는 구곡폭포를 보실수 있습니다.

거리가 상당히 멀기때문에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할것입니다. 충분히 먹을것도 드셔야 하고..
하루에 25~ 30KM씩 가신다고 하면 3~ 5일이면 춘천에 도착하실수 있으실 것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

re: 서울 강남에서 춘천까지 걸어서 가려고 합니다
jsys4666 (2005-04-01 11:15 작성)

차로의 길이 복잡하니 한적한 길을 알려 드릴께요.

먼저 강남에서 잠실 서하남 IC로 해서 하남 미사리 조정경기장으로 해서 팔당대교를 넘어 예전국도로 가면 다산 정약용 기념관에서 일박을 하세요.

그리고 양수리로 해서  서울 종합촬영소를 거쳐 대성리로 가서  이박 하고요.

그리고 경춘국도로 가면 청평 남이섬이나 혹은 강촌에서 일박하고

춘천 파라호나 소양댐으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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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은 특별한 준비를 하지도 못한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은 석달 정도, 무신경하면서도 권태로운 일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누워서 보냈다. 처진 몸으로 퇴근을 하고 나면 씻지도 않은채 누워 TV를 보다가, 이내 다음날 아침이 되어 허겁지겁 출근을 하고는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일을 반복했다. 주중에는 그저 금요일밤이 언제오나...남은 날들을 헤아려 보는 것이 소망의 전부였다.

그렇다고 주말이 되어서 특별한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한도전'이나 '개그콘서트'로 마음을 달래고,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은 뒤에 한낮에도 골아떨어지는 부끄러운 일상이었다. 외출이라고는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전부. 그것도 목사님 설교가 시작될 쯤, 느즈막히 말이다.

시간이라는 도로 위에서 힘차게 달려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민히 있어도 움직이는 Time escalator에 앉아 주변을 멀거니 응시하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가 되었고, 모든 것을 체념하며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버렸다.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원더랜드>라는 쿠바여행기를 봤다. 쿠바의 소소한 일상들과 장면을 아스팔트처럼 딱딱하고 까끌하게 풀어놓았다. "나도..언젠가는.."이라며 이번에도 그의 자전거 여행을 부러워만 했다.

그래. 올해 안으로 세상밖으로 떠나는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하자. 이런 저런 생각이 미치게 되자, 30여년을 살아왔던 이곳 한국의 이야기도 충분히 흥미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는 한국을 아는가? 문득 여행자의 심정으로 지금의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밤 12시가 지나도 사람들이 편안히 걸을 수 있는 곳. 근사한 자전거 도로와 무조건 빨리빨리 진행되는 일상들.

사무실에서,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여행지에서의 관심과 애정을 보인다면 대체 흥미롭지 않을만한 일들이 무엇일까.

회사생활은 아르바이트라 여기자. 4년째 지속하고 있지만 정직원들보다 훨씬 훌륭히 업무를 수행하는 비정규직. 기한을 정해 놓으니 어느 하나 버릴 경험이 없고, 어느 하나 소홀히 할 만한 인연이 없어 보인다.

인생이 새로워지고 하루가 다시 촘촘해지기 시작한다. 이 영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걸까. 2007년이 다시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맛나는 음식, 좋은 경험, 다양한 사람들을 다시 경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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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


감사합니다. 오늘 세계 최고의 명문들 중 하나인 이 대학의 학위수여식에서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으며, 이번이 제가 대학 졸업식장에 가장 가까이 와 본 경우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게 다입니다. 거창한 얘기도 아니고, 딱 세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인생의 전환점들을 잇는 일입니다. 저는 리드 칼리지를 다니다가 6개월 만에 그만두었습니다만, 이후 18개월 동안 청강 생활을 하다가 아주 자퇴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의 생모는 어린 미혼모로 대학원생이었으며, 저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대학 나온 가정에 입양시켜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셨고, 저는 태어나자마자 어느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한 가지 예외라면, 제가 세상에 나왔을 때 이 부부는 마지막 순간에 여자아기를 입양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저의 양부모께서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다가 한밤중에 전화를 받게 됩니다.
"착오가 생긴 남자아기가 있는데, 입양하시겠습니까?"
양부모님께서는 "물론"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생모는 나중에 제 양모가 대학 졸업자가 아니며 제 양부는 고등학교조차도 못 나오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생모는 입양서류에 서명을 거부 하셨습니다. 생모가 몇 달 후에 마음을 누그러뜨린 것은 저를 대학까지 보내겠다는 약조를 받은 후였습니다. 제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7년 후 저는 정말로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참 순진하게도 이곳 스탠포드만큼이나 등록금이 비싼 대학을 골랐고, 노동자층이셨던 양부모님이 평생 모으신 돈이 모두 제 등록금으로 소모되었습니다.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의 가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인생을 어찌 살아갈지 몰랐고, 대학 공부가 그것을 알아내는 데 어떤 도움을 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들이 평생 저축한 재산을 축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정합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으로 믿으리라 결심하면서 말이죠. 당시에는 참 두려운 결정이었지만, 돌이켜 보건대, 그것은 제가 내렸던 최고의 결정들 중 하나였습니다. 자퇴를 결정한 순간부터 흥미가 없던 필수 과목들을 중단할 수 있었고, 제게 훨씬 더 흥미로운 강의들을 청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생활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기숙사에서 지낼 수 없었으므로 친구들의 방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콜라병을 반납하고 받는 5센트씩을 모아 끼니를 해결했고, 헤어 크리슈나 사원에서 주는 맛있는 식사를 얻어먹기 위해 매주 일요일 밤마다 마을을 가로질러 7마일을 걸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호기심과 직관대로 행동하면서 마주친 것들 중 상당 부분이 후에 돌이켜 보니 무한히 값진 것들이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죠.

당시 리드 칼리지는 이 나라 최고의 필기체 강좌가 있었습니다. 캠퍼스 곳곳에 붙은 포스터, 모든 서랍의 라벨마다 참으로 아름다운 필체로 적혀 있었습니다. 자퇴한 저는 정규 강의들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에, 서체 강좌를 수강해서 이것을 배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삐침이 있는 글꼴과 없는 글꼴에 대해 배웠고, 서로 다른 문자들을 조합하면서 자간을 조절하는 법도 배웠고, 좋은 글꼴의 조건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움과 역사와 예술적 섬세함이 과학이 매료시키지 못할 방식으로 배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에 매혹되었습니다.

이렇게 배운 것들이 제 인생에서 실제 활용되리라는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저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이 모든 것들이 제게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모든 것들을 맥의 디자인에 포함시켰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글꼴을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바로 그 강의를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맥은 그렇게 다양한 글꼴을 지니거나, 자간이 비례적으로 조절되는 서체를 가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MS社의 윈도가 그저 맥을 본뜬 것이기에, 퍼스널 컴퓨터 또한 결코 그런 글꼴을 가질 수 없었을 겁니다. 제가 대학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그 서체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것이고, PC들 또한 오늘날 가지고 있는 그 아름다운 서체들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학 다니던 당시에는 미래를 생각하며 그런 계기들을 잇기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 후 뒤돌아보니 그런 점들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순간들이 앞으로의 인생에서 어찌 연결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뒤돌아보고서야 그 연관성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작은 계기들이 어쨌든 미래에는 연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무언가를 믿어야 합니다. 그게 용기든, 운명이든, 인생이든, 인연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말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러한 점들이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자신의 가슴에서 나오는 판단을 따를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로 인해 탄탄대로를 벗어나게 될 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인생이 변화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일찌감치 제 인생에서 사랑하는 것을 찾아냈으니까요. 제 친구 워즈와 저는 스무 살 때 제 부모님의 차고에서 애플이라는 회사를 차렸습니다. 열심히 일했고, 10년 만에 애플은 달랑 두 명뿐인 차고에서 4000명이 넘는 종업원을 거느린 20억 달러 규모의 대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의 최고 걸작품인 매킨토시 컴퓨터를 출시한 지 일년 후, 당시 막 서른이 되었는데,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해고당할 수 있을까요? 애플社가 성장하면서 저와 같이 회사를 운영해 갈 대단한 재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던 사람을 채용했고, 첫 1년여 기간은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그 뒤부터 미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불화가 생겼습니다. 우리 사이가 틀어지자 회사 이사진은 그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나이 30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개적으로 말입니다. 제 성인기 전체의 목표가 사라졌고, 정말 참담했습니다.

몇 달간은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제가 선배 기업가들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바통이 막 제게 넘어오려는 순간에 그걸 떨어뜨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데이빗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 그토록 엉망으로 만든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철저히 실패한 사람이었고, '아예 이 업계를 떠나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제 머릿속에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가 하던 일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애플社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도 그 사실을 조금도 바꿀 수 없었지요. 비록 거부당했지만, 저는 여전히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애플社에서 해고당한 것이 제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었던 걸로 드러났습니다. 성공해야 한다는 정신적 부담이 再출발하는 초심자의 홀가분함으로 바뀌었는데, 모든 것에 확신을 가질 필요가 적으니까요. 그것을 기회로 제 자신이 자유로워지면서 제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기들 중 하나로 접어들게 되었지요.

그 후 5년간 저는 「넥스트」라는 회사와 「픽사」라는 또 다른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제 아내가 될 대단한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발전을 거듭하여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제작했고, 현재 全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했고 저는 애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넥스트에서 개발했던 기술이 바로 오늘날 애플의 부흥을 이루어 낸 핵심입니다. 그리고 로렌스와 저는 멋진 가정을 꾸렸습니다.

저는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양약은 쓴 법입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머리에 돌을 맞는 일도 일어납니다.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저는 확신합니다. 저를 계속 이끌어 온 힘은 바로 제가 하는 일을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할 만한 것을 찾으십시오. 연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을 찾는 것 또한 진실로 중요합니다. 일은 여러분 인생의 큰 부분을 채울 것이며, 따라서 진정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런 일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보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것을 찾아내는 순간, '이것이다'라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관계라도 다 그렇듯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찾아보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열일곱 살 때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인생의 매순간을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그러면 언젠가 분명 옳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저는 이 글에 감동을 받았고, 그날 이후, 지난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며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과연 내가 오늘 하려는 일을 할까?" 그리고 그 대답이 여러 날 계속해서 "아냐"라고 나온다면, 무엇인가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죽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의 중대한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들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들, 모든 외부로부터의 기대•자존심•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이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며, 정말 중요한 것만 가려내 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언가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미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오전 7시30분에 스캔을 받았는데, 제 췌장에 종양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췌장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이것이 '치유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고 말하면서 제가 앞으로 3개월에서 6개월 이상은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제게 '집으로 돌아가 주변을 정리하라'고 했는데, 이 말은 '죽을 준비를 하라'는 의사들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또한 자녀들에게 앞으로 10년간 할 모든 이야기를 단 몇 달 만에 다 하라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이는 또 모든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짓고 유족들이 가급적 편안해지도록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작별 인사를 해 두라는 소리이기도 하지요.

저는 이 진단대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조직검사를 받았는데, 제 식도를 따라 내시경을 집어넣은 다음, 위를 통하고 장을 거쳐 췌장에 작은 바늘을 찔러 넣은 다음 종양에서 세포 몇 개를 채취했습니다. 저는 차분했습니다만, 그 자리에 있던 제 아내의 말에 따르면,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들을 관찰하다가 울기 시작했다더군요. 제 암이 매우 희귀한 췌장암으로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저는 그렇게 수술을 받았고, 고맙게도 지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제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가본 경험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수십 년 살아가는 동안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보니, 이제 여러분에게 죽음이 유용하긴 하나 순전히 상상 속의 개념이었을 때보다 좀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들조차 죽어서 거기에 가려고 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우리 인간이 공유하는 최종 도착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생명이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변화 인자입니다. 죽음은 옛 것을 처분하여 새로운 것을 수용할 자리를 만듭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새로운 것이지만,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여러분은 점점 낡아지게 되고 점차 처분될 것입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말씀 드려 죄송하지만, 그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합니다. 남의 인생을 사느라 그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독단의 덫에 빠지지 마십시오. 남들의 생각에서 나온 결론에 맞추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남들의 의견에서 나오는 잡음에 여러분 내면의 소리가 묻히도록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를 내어 여러분의 가슴과 직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가를 이미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The Whole Earth Catalog」라고 하는 대단한 잡지가 있었습니다. 저희 세대에게는 가장 권위 있는 책들 중 하나였지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멘로 파크에서 살던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들었죠. 그는 나름의 시적인 감각을 동원하여 그 책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당시가 1960년대 후반으로, PC라든가 데스크톱 출판 기술이 나오기 이전이었습니다. 당연히 타자기, 가위, 그리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만 가지고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문고판 검색엔진 구글(Google)과 같은 것이었는데, 구글이 등장하기 35년 전의 일었습니다. 이상적인 사고들이 담겨 있었고, 깔끔한 도구와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흘러 넘쳤습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The Whole Earth Catalog」를 몇 회 정도 발간했고, 나올 만큼 나왔다 싶었을 때 최종호를 냈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중반이었고, 제가 여러분 나이쯤 되었을 때입니다. 그 최종호의 뒤표지에는 이른 아침 어느 시골길 풍경을 담은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여러분이 모험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며 가보았을 것도 같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사진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갈구하라. 바보짓을 하라)」 이것이 그들이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남긴 작별 인사였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저 또한 언제나 그렇게 살기를 바라왔습니다. 이제, 졸업을 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여러분께 같은 말씀을 드립니다.

계속 갈구하십시오. 바보짓을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2007.01.0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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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내가 너무 미웠어.
그래서 막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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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행동
나의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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