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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에서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를 봤다. 요즘은 늘상 학원 폭력물이나 이상한 쇼츠에 절어져 있었는데,  문학적으로 훌륭한 완결을 보여준 작품에 정화된 기분이다. 연극을 본 나는 여운을 느끼고 싶어 명동에서 신촌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벅찬 마음은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가슴 안에서 뛰어다니고 있다. 지금 나는 접시채 내놓은 인간 낙지 탕탕이 같다. 

 

재주 많고 발랄한 여인 록산느를 사랑하는 세명의 군인이 있다.  드 기슈는 가문이 출중한 청년 장교, 시라노는 재주많고 글솜씨가 뛰어난 추남. 크리스티앙은 문학에는 젬병이지만 훤칠한 미남이다. 미남 크리스티앙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 록산느, 록산느는 크리스티앙에게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달라 하지만 그는 제대로 된 문장을 한줄도 쓰지 못한다.

 

이 상황을 옆에서 보고 있던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편지를 써준다. 목숨을 건 전장에 가서도 계속해서 써준다. 편지에 담긴 아름다운 마음들에 완전히 빠져버린 록산느. 록산느가 사랑하는 것은 크리스티앙일까 시라노일까. 

 

세 명의 군인 모두 덜 떨어지고 허술했지만,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사랑을 했다. 드 기슈는 권세를 이용해 록산느를 지켜주고, 시라노를 문학을 통해 그 마음을 표현했으며, 크리스티앙은 단순하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록산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마음들은 목숨을 바칠만큼 대단했다.

 

완벽한 아름다움 앞에 느껴지는 완벽한 좌절 그리고 청춘의 어리석음 같은 것이 느껴져서 보기 좋았다. 갈고 닦은 이 마음들은 오래된 책상의 윤기처럼 빛이 났다. 그리고 알려주었다 "사랑은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아"

 

나도 중학생 때는 친구를 대신해서 연애편지를 써준 적이 있다. 그 여학생은 학원에서 누구나 알아볼 만큼 빼어난 미모였고, 나같은 것은 어불성설 넘보지도 못할 존재였다. 나름대로 글솜씨에는 자신 있었기 때문에 친구의 한심한 러브레터를 조금 첨삭한다는 것이 나중에는 대필이 되었다. 

 

감정이입. 어느새 내 마음을 듬뿍 담아 한가득 써준 편지에 친구는 만족했고, 후에는 잘 풀리고 있다며 희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이 성공의 소식에 뿌듯하면서도 쓸쓸해지는 이상한 마음을 둘 다 감지하고는, 이후에는 청탁을 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청소년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라는 말머리 때문에 애들이 보는 연극은 아닐까 우려했는데, 나를 푸른 소년의 시절로 다시 데려와 주었다. 이 애틋한 이야기를 친한 친구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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