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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0 23:19

18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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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차. 이제 300km도 남지 않았다.

이제는 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이는 걷는 기계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도 나약한 인간. 30km를 걸으니 오늘도 힘들었다. 

오늘 같이 버거운 날에는 즐거운 주제로 대화를 나눌수 있는 벗이 하나 있다면 좋았을텐데. 나는 그운을 초반에 다 써버린 것같다. 이상하게 어제도 오늘도 숙소에 한국인 한명이 없다.


도착해서 씻고 빨래하고 널고 치료하고 일기를 좀 쓰고나면 오후 4시가 훌쩍 넘는다. 주변의 성당을 찾아 기도를 하고, 저녁을 해먹을지 사먹을지 골라서 준비를 한다. 이 정도 일과를 끝내고 나면 오후7시. 자유 시간이 많아봐야 딱히 할일도 없지만 고되기가 옛날 부대 생활 못지않다. 저녁에는 낯선이들과 모여있는 방에서 자야하니 점호 받는 기분도 들고. 어쨌든 매일 매일 훈련 뛰는 기분이다.


나는 아직끼지 빈털탈이 같지만 이제 이 순례길을 슬슬 마무리 할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즐거운 여정이든 고된 여정이든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교훈을 얻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


2024.06.09 03:43

16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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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차

이 길에 대체 무슨 답이 있을까. 나는 답을 써보려 시험장에 나왔지만. 출제자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넓은 이곳의 평야가 빈 교실 처럼 느껴진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 인간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이것이 내가 몇년 동안 품에 안고 있던 질문이다. 들판을 걸으며 자꾸만 물었다  그 분은 무관심으로 지금 대답하고 계시는 걸까. 이것이 그분이 내게 답을 말하는 방식일까.


탁트인 평원을 걷고 또 걷다보면 내가 다 닳아 없어지는 것 같은데도. 오만 가지 불만과 욕정. 나쁘고 추한생각들이 돌처럼 탁탁 튀어 오른다. 등산화 속에 파고 들어와 나를 괴롭한다.





2024.06.0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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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인기맨이었다. 얼굴은 좀 못생겨도 늘 웃음이 넘치고 즐거우니까 대학 시절 내내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고, 직장에 들어와서도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는게 힘든 일인 적이 없었고. 알고나면 나를 좋아해 줄거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좀 흔들린다. 나를 싫어할수도 나를 꺼려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 찾아온다. 대학때부터 오래 알던 친구들도, 직장에 들어온 젊은 친구들도, 이런 낯선 곳에서 새로 만나는 사람도. 나를 매력없게 생각할 수 있을거다. 나를 피곤해 할 수 있을 거다. 한번 이런 의심이 드니까 모든게 조심스러워 진다.

 

나는 이제 비호감인가. 어떤 부분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거겠지만.  어떤 부분은 노력과 상관 없이 발생하는 것 같다. 나이 듦이란 이런걸까. 매력의 빛이 누렇게 바래기 시작한다. 어쩔수 없는 때가 오는 것만 같아서 당황스럽다. 

 

 

 

 

 

 

 

 

 

 

 

 

 

 

 

 

 


2024.06.07 23:23

15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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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차
어제의 툴툴거림이 무색하게 오늘은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다. 날은 걷기좋게 흐렸고. 비도 몇방을 내렸지만 오히려 신선한 느낌이었다. 땅도 걷기 좋은 흙길이에서 발도 편안했다.

한국 사람을 좀 피해서 왔는데. 오늘은 아일랜드에서 온 3형제와 잉글랜드 여자분, 미국 메사추세츠에 사는 청년과 이야기를 나눴다. 의사는 통하고 정보는 나눴지만  역시 언어의 벽이 커서  그분들이 먼저 답답했을 것이다.


깨끗한 알베르게와 쾌적한 시설에서 문제 없이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나는 스페인 사람처럼 오수를 즐겼다. 아무런 특별한 일 없이 이렇게 하루를 보내도 되는걸까. 여백이 절반인 평화로운 날.






2024.06.07 03:29

14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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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일차.


여정이 중반에 돌입했다. 종일 힘들기만 했던 하루. 땡볕의 도로를 걷고 또 걸었다. 모르는 이들과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던 다정한 숲길 따위는 없어지고. 그야말로 ’한번 뜬 백일이 불사신처럼 작열하는‘ 땅에 진입했다. 


길에 답이 있고, 걷는 것에 답이 있을거라는 처음의 집중력도 이제는 흐트러졌다. 길에 무슨 답이 있어. 땡볕에 비싸게 음료수를 파는 장사치들만 있는 걸. 


얼른 오늘의 목표 33km를 돌파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낯선 서양인들은 선수처럼 때론 경쟁자처럼 느껴졌고, 이 불볕의 레이스에서 나도 너무 외롭기만 했다. 


지겨운 행군을 이겨내기 위해 유튜브를 틀었다. 내가 좋아하는 과학 유튜브. 밤하늘은 왜 까맣게 보이는가. 다른 행성에서 물을 찾는 것이 왜 중요한가. 제임스웹 망원경과 수면의 중요성. 아데노신까지. 저 머나면 우주에서 바라본다면 지금의 순례길 800km는 개미의 꿈틀거림 조차 되지 않을텐데. 이 하찮은 움직임에서 나는 무얼 발견 할수 있을 것인가. 


오늘은 몸도 마음도 무너진 하루였다. 몇몇 젊은이들은 가볍게 버스를 타고 이 길을 뛰어넘었다. 즐거운 대도시 관광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것 같았다.  나는 그런 요령도 없다. 내일이 크게 기대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인생에는 그렇게 버텨야 하는 날도 있으니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내일은 26km, 오늘보다는 쉽다. 그러니 발가락아. 잘버텨줘.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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