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내가 앉아 있는 편성기획부 자리 뒤에는 붙박이장 처럼 벽면 전체를 채운 철제 캐비넷이 있다. 녀석은 회사의 주요문서들을 보관할 듯, 강하고 탄탄한 위용을 보였다. 지난 주 월요일이었던가. 부장님이 묵직한 쇼핑백을 가지고 오더니만, 육중해 보이는 이 철제 캐비넷을 여는 것이다. 그곳에는 만화책이 이중으로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나도 만화책 올리는 것을 도와드렸는데, 화제가 자연스럽게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으로 옮겨졌다. 부서원들 눈이 반짝 반짝.
2. 3월 중순까지는 교육이 계속 될 것 같은데, 그 때까지 나도 이것 저것 배우고 있는 중이다. mbc에 와서도 평소처럼 검색능력을 발휘하여, 이것저것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데 뒤에서 들리는 소리 "쓸데 없는 짓 하지말고 TV나 봐." 편성기획부에서는 TV 많이 보는 사람이 왕이다. 드라마 스토리, 새로 나오는 드라마, 연출, 작가를 줄줄줄 외우고 있어야 한다. 편성기획부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프로그램의 개선점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동물의 왕국보다도 떨어진 '일밤'의 시청률을 올리는데 모두들 신경쓰고 있다. 특히 이번주에 시작되는 '간다투어'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다. 1분대 시청률 그래프를 그리고, 그 시간대에 연령별 시청층을 파악하고, 12주간 시청률 추이를 파악한 뒤, 전략의 베이스로 삼는다. 대부부의 의견은 직관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어떻게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상대에게 전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나는 보통 한 프로그램을 보면 3가지 정도의 굵은 의견이 나올 뿐인데, 4년차 베테랑 여자선배는 7~8가지를 뽑아내며 이곳의 에이스임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중압감 때문에 무릎팍 도사도, 일밤도 편안하게 볼 수만은 없는 직업이다.
3. 딩동딩동. 천정에 달린 스피커에서 사장님 이 취임식에 대한 공지사항이 나온다. 이런 건 동네 이장아저씨들이 하는 건 줄 알았는데. TV에서 보던 아나운서가 "알립니다"라며 자질 구레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국민의 공주님들이시겠지만, 이곳에선 그 분들도 일개 사원나부랭이(?)일 뿐이다.
4. 새롭게 취업이 된 후 가장 많이 이야기 듣는 것 중 하나는 연예인을 보면 싸인을 받아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선배들은 "그런 짓은 개념 없는 것"이라며 교육을 시킨다. 현장에서 그들을 컨트롤 해야되는 입장이니까 그럴 것이다. 그런 지시사항을 들은 이후로 연예인을 봐도 태연한 척 극도로 노력한다. 그래도 포카페이스 없는 내 얼굴의 놀란 장면은 상대에게 그대로 비춰질 것이다. "최불암 아저씨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어요"라고 말하던 한 선배. "처음 보는 애가 꾸벅 인사를 했으니 상대도 당황했을 것"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린 TV에서 수십년을 보니까 엄청 친근한데, 상대는 생면 부지의 사람이 인사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5. 식사시간에 연예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드라마 줄거리를 말하는 것도 모두 업무의 연장인데, 40대 넘으신 어르신들이 TV를 가지고 수다떠는 것이 나는 아직도 적응이 안된다. "신입사원들은 주말에도 나와서 일 좀 하고"라는 말이 이곳에서는 "주말에도 TV좀 열심히 보고!"로 치환된다. 누군가 직업정신을 잃지 않고 "무대에서 죽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라고 이야기했던 그 비장한 말은 아마 "TV를 보다가 죽는 것이 제 꿈입니다"로 바뀌겠지. TV가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