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참,
신기하도다-
아마 무슨 토요일 저녁이었던거 같다. TV를 보며 누워 있다가 얼마 전에 신청했던 무한도전 달력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어랏, MBC에서 사람 뽑네. 경력사원 모집이란다. 이런 것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훑어보니, 6개 부분중에 홍보직도 있는 거다. 이쯤 되어서 내 이력을 한번 정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클릭. 회사 다닌지 5년째 되면서 처음으로 경력사원 지원신청을 해봤다. 아무튼 큰 기대를 안한 채로, 과장되고 자극적인 이력서를 날려보냈는데, 이상하게 느낌이 좋긴 했었다.
1차 합격 10명의 후보안에 들었다는 메일이 날라왔다. 홍보직에 최종적으로 한 명을 뽑는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경쟁률이 무려 500대1이었다. 경쟁률을 알고나니 묘한 도전의식이 생기기 시작한데다, 막상 직접 찾아가서 MBC를 보니 떨리기도 하고 욕심이 슬슬 났다.
첫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작문시험을 한다는 거다. '서울역' 세글자와 함께 휑한 여백만 있었다. 정호승의 시였던가..."그들은 어제 저녁부터 '잠'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라는 구절을 모티브로 해서 줄줄줄 글을 써 나갔다. 눈뜨면 코 베간다는 소리에 긴장했던 서울입성의 긴장감은 이제 뒤로하고, 화장실에 붙은 노란스티커를 훑어보며 콩팥이며 안구를 팔아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대학시절 행려자를 도우려다가 두달만에 결국 포기하고 보호소로 돌려 보냈을 때의 충격. 서울역 사람들은 잠을 먹고 살지만 꿈을 꾸지는 못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이후에는 1차 면접을 기다렸다. 30분정도씩 치뤄지는 1대 4인 면접이었다. 난 4번이었는데, 앞에 있는 사람들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들어오고 있었다. 엄청난 압박면접이겠구나라는 생각에 걱정을 했지만 별수 없었다. 사실상 MBC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그냥 밝은 성격으로 승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명색이 홍보팀인데, 홍보기획안 정도는 물어보지 않을까해서 '뉴하트' 홍보방안 정도는 2가지 생각해놨다. 면접장에 들어갔다. 가지고 온 포트폴리오에 있는 수험번호를 읽으며 자기 소개를 했다. "아니 밖에서 수십번 연습했을텐데, 수험번호도 못 외웠어요?" 누군가 큰 소리로 나의 면접의 스타트를 끊었다. 난 '씨익' 웃어주었다. 수험번호 외우는 걸로 회사생활 할 것도 아니니까. 선수끼리 왜 이러십니까요. "이력서를 보니까, 여기저기 오타도 많고 평소에 좀 덜렁대죠?"라고 또 강하게 물으셨다. 사실 내가 회사에서 제일 많이 혼나는 사람이다. 근데 그런건 신뢰관계가 쌓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위의 과장님도 내가 열심하는 중에 실수한다는 걸 알고, 나도 과장님이 나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혼나는 건 나한테 별로 데미지를 입히지 못한다며 또 웃음으로 이야기했다.
이 후에도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했다. 모두들 나의 이력을 흥미있게 보는 것 같았다. 카툰도 그리고, 이종격투기도 하고, 아카펠라도 함께 하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해줬다. 월급은 어떻게 쓰느냐는 이야기에 20만원정도 후원하고, 나머지는 그냥 통장에 둔다고 부끄럽게 말씀드렸다. 알다시피 난 늘 유학을 꿈꿔왔기 때문에 적금을 할 여유는 없었다. 재차 들어온 질문은 어머니에게는 돈을 안드리느냐는 이야기였다. 최근 들어 100만원 50만원 100만원 50만원 이렇게 드렸던 이야기를 하며, 어머니가 자꾸 비싼값에 온열치료기 같은걸 집에 들여와서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같이 해줬다. 나도 안다. 똑똑하게 우등생처럼 이야기한다고, 그 아이가 회사생활을 최적임자는 아니라는 것을. 성격좋고 트러블 일으키지 않고 열심있는 사람이 회사에서는 제일 편하다. 밑으로 들어와서 상전으로 모셔야 되는 녀석들이 제일 골치 아프다.
나는 엠비씨를 주도 면밀하게 준비한 것도 아니다. 사실 무한도전 달력 받으려고 홈페이지 들어왔다가 여차저차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 지금까지는 나한테 월급 주고 있는 회사에 충성하며 살았다. 난 사무실에 앉아서 맨날 이직 생각만하고 살고 있는 불만있는 녀석이 아니다. 후배들도 "선배님이 홍보팀 에이스잖아요"라고 이야기 한다. 라는 둥의 편안한 이야기를 했다. 면접관들도 박장대소 하며, "당신은 장난으로 지원한지 모르겠지만, 500명을 뚫고 여기까지 왔으니 그 쪽 회사의 에이스인 것은 분명하다"며 즐거워했다. 그러더니, 당신이 원했던 무한도전 달력만큼은 자기가 챙겨주겠다며 나와 함께 8층으로 내려가서 무한도전 달력과 열쇠고리를 전해줬다. 뒤늦게 생각난 나의 유천닷컴 명함과 스티커를 부국장님께 전해줬다. 이것도 당신이 만든거냐며 그는 또 한번 신기하게 나를 쳐다봤다.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떨리기도 했다. 나는 결국, 홍보팀 후보 최후의 3인에 선정됐다. 면접이 있던 월요일엔 조용히 휴가를 신청했다. 지난번에 준비한 포트폴리오를 6세트 프린트해서 면접관 모두에게 돌리기로 했다. 그리고 쓸데없는 영어 인터뷰 준비를 계속해댔다.(무한도전 프로그램과는 달리 그들은 전혀 영어로 물어보지 않았다 ㅠㅠ) 최종면접. 최문순 사장과 부사장, 그리고 알수 없는 분들이 와 계셨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딱딱한 분위기로 면접은 진행됐다.
알고 봤더니 MBC 홍보직에는 이 회사 출입기자들도 많이 지원을 했다. 오른쪽에 앉아있던 고대 사회학과 선배도 사실은 CBS기자로 근무하고 있는 중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 형님이 낙점된 상황이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MBC 홍보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 무엇이냐?"는 둥 심도 있는 질문을 하더니, 나한테는 "머리가 왜 그래요?"라는 둥 싱거운 이야기만 물어봤다. 다들 우등생처럼 또박또박 대답했고, 난 너무 뻔한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했다. 중간중간 말이 끊기고 하나도 제대로 마무리 한 것이 없었다. 나를 포함한 면접장에 있는 모두가 수험번호 750213 유천 지원자의 탈락을 예감했다. 난 그냥 창피해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이렇게 터덜터덜 집으로 가며,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일장춘몽 아 ~ 청춘의 단꿈도 이렇게 막을 내리는구나하며 허탈하게 농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통화도중 갑자기 전화기에 벨이 울리더니, 엠비시 사옥 10층으로 다시 올라오라고 했다. 사실 아까 함께 면접을 봤던 2인을 마주치는 것조차 창피해서 가는 길이 고역이었지만, 알겠다고 대답하고 부끄러운 걸음을 옮겼다. 편성국장실로 들어오란다.
앗, 나머지 2인이 없다. 그리고 편성국장과 실무진 2인이 있었다. "자네 혹시 편성PD 하라고 해도 하겠나?" 앗. 이건 또 무슨 반전인가. 물론 넙죽 받아들였다. "목숨을 다해서 충성을 하겠습니다만은, 사실 저는 편성 PD가 뭐하는 건지 모르는데요"라고 웃으며 이야기하자 핀잔을 줬다. "아니 신방과 나온 사람이 편성PD도 모른단 말야? 그래 모를 수도 있지. 모르면 이렇게 모른다고 시원하게 대답을 해야지. 아까 걔네들은..." 나를 대하는 분위기가 좋았다. 나도 자신감이 생겼다. 다시 유천닷컴 스티커와 명함을 나눠주며 설레발을 풀기 시작했다. "진짜 할텐가?"라고 재차 묻길래, 유천닷컴 도장이라도 찍어드릴까요..라며 농을 주고 받았다. "아직 다 된 것은 아니니, 일단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게"
어제가 예비 소집이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8인들은 다들 으리으리한 사람이었다. 굳이 MBC에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을 만큼 충분한 커리어가 있는 분들이었다. 편성국에 경력PD를 뽑은 것도 MBC사상 처음일 거고, 다른 부분을 지원한 사람이 이런식으로 바뀌어서 합격한 것도 SBS에서 한 번 있었을 뿐 드문 사례라며, 내 합격의 희소성에 대해 설명해줬다.
대체 하나님은 왜 나를 이곳으로 부르셨을까. 오랜 기간 동안 간절히 원한 사람도 아니었는데. 나름대로 중압감이 엄습해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할 때도, 합격을 부탁한다는 말씀은 드리지 못했다. 이미 당신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가장 값진 것을 주셨다는 자각에 눈물만 나왔다.
무엇일까. 무엇일까. 조금 어이없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인생의 또다른 막이 시작된다.
무엇보다 겸손하게 살아야겠다. 조용히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겠다.
아, 작은 망치로 누군가 머리를 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