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문, 그리고 경찰의 통제
대한문 앞에 자발적으로 차려진 시민들의 추모 행렬을, 경찰이 만 여 명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해 가로막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치 50년대, 70년대, 8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어느 한 사람의 죽음을 전 국민이 애도하는데, 정부는 민란이 날 것을 우려해 대규모의 경찰 병력을 동원해 막고 있고, 정부에서는 긴급한 대책회의에 부심하고 있다는 것.
저는 아프리카TV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50년대, 70년대, 그리고 80년대를 떠올렸습니다.
이승만에 맞선 야당 후보들이 잇따라 병으로 서거하자, 국민적인 애도의 물결이 일어났으나, 이승만 정권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탄압하였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곧 정권을 붕괴시키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으니, 마산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숨진 김주열 열사의 죽음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4.19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70년대,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70년대 노동운동에 불을 당겼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열사의 장례식을 극도로 통제하였으나, 그의 죽음은 결국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80년대, 경찰의 손에 숨진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 그들의 죽음은,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었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갑호비상령에 준하는 최고 상태의 경계령을 전 경찰에 하달했다고 하더군요. 검찰과 법무부, 나아가 관계장관들이 합동 대책회의를 열었다고 하는데, 그 주 목적 가운데 하나가, 전국민적 애도의 물결이 집회 시위로 번지지 않도록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정부가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그런 걱정을 한다는 것은, 이 정권이 민주적 정당성을 이미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정권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이 정권이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80년대 6.10항쟁 직전을 보는 듯 하군요.
이 정권이 경찰과 검찰에 의한 공포정치로만 정권의 안위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밖에 정권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면, 이 정권은 사실상 끝장이 난 정권입니다.
2. 검찰에 대한 생각
저는 단순한 법률학도로서, 매우 간단한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직 중 박연차 회장이 대통령의 가족에게 돈을 줬다. 그 돈으로 아들은 사업을 했다고 하고 딸은 전세금을 냈다고 한다. 둘 다 아버지가 미국으로 내 보내서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게 팩트입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죠? 대통령 가족은 돈 거래 하지 말라는 법도 있습니까?
대부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리가 있다는 걸 전제에 깔고 있는 상태인데, 저는 명백히 그 전제에 반대합니다. 노무현은 죄가 없습니다.
검찰은 노무현의 가장 아픈 부분이 돈 문제란 점에 주목한 듯 합니다. 평생 가난한 재야 정치인으로 살아온 노무현, 그래서 항상 돈 때문에 쩔쩔맸고 몇몇 기업인들에게 신세를 졌던 노무현. 아들 딸이 설령 사고 칠까봐 재임기간 중 미국으로 쫓아낸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이 생판 모르는 기업들로부터 돈을 걷었다면 모르겠는데 수십년간 알아왔던 후원자에게 돈을 얻어 썼다면, 그것이 과연 형법상 뇌물죄의 구성요건에 해당되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듭니다. 도덕적으로는 비난 가능성이 있으나, 그의 주장대로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본인 모르게 가족들이 돈을 받아 썼다면 그가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물론 정치적인 책임은 그에게 귀속됩니다만)
아마도 검찰의 시나리오는 이랬겠지요. 우리 판례가 뇌물죄 성립을 위해 요구하는 직무관련성과 대가성이란 구성요건은 완화해서 보고 있다. 대통령은 그 직무의 범위가 모든 국정 전반에 미치기 때문에 직무관련성은 충족되고, 대가성이란 게 특별히 뭘 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저 "좋은 관계를 위해서" 라고 해도 대가성이 인정된다. 실제로 박연차는 농협의 알짜배기 자회사인 휴켐스를 인수하지 않았던가? 노무현의 형 노건평은 농협이 세종증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돈을 받지 않았던가? 박연차가 준 돈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준 돈이 아니다. 다 쓸 데가 있는 돈이다. 큰 틀에서 보면 박연차가 뿌린 돈의 힘이 드러나지 않았나? 노무현이 직접 그 돈을 안 받았어도, 뇌물죄로 처벌해야 마땅하다. 다른 공무원들도 다 그렇게 처벌 받지 않았나? (판례를 흔들대며) 원래 공무원이 이렇게 큰 뇌물 받으면 구속수사가 원칙인데 전직 대통령이라 봐 준 것이다. 이미 우리는 노무현이 대통령 재직 당시 가족에게 돈이 흘러들어갔다는 걸 알고 있었으며, 노무현이 적극적으로 요구하기까지 했다는 박연차의 진술을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면 뭐 게임 끝 아닌가? 당연히 뇌물죄가 성립한다.
이런 시나리오라면, 노무현의 정치적 생명은 끝입니다.
(물론 무죄는 나올 수 있습니다. 뇌물죄의 성립여부는 사실관계 전체를 종합하여 판단해야 하며, 설령 가족이 돈을 받았다는 걸 알았다 하더라도, 뇌물죄가 성립할 수는 없고, 돈 좀 달라고 했다고 하더라도 수십년 간 친분관계를 맺어온 후원자에게 부탁한 것이 뇌물죄라고 볼 여지가 없는 건 아니나 이번 사건에서는 뇌물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박연차의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상을 종합하면 무죄다...이런 식으로)
변호사이자 치밀한 정치가인 노무현이 검찰의 수, 예상된 시나리오와 그 결과를 읽지 못했을까요? 당연히 그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는 있을 지언정, 법적으로 뇌물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충분히 뇌물죄로 의율될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판례의 태도를 볼 때)
그 과정에서 그의 가족과 측근은 모두 구속되거나 소환 조사를 받았고, 대단히 큰 상처를 받았으며, 노무현 자신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검찰은 비열하게도 수사 내용을 일부 언론에 계속 흘렸습니다.
그가 설령 재판에서 무죄를 받는다 한들, 무엇하겠습니까? 아무도 무죄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짓말쟁이이자 부패한 정치인 노무현으로 기억될 뿐이지요.
저는 그것이 검찰의 시나리오이며, 이 정권의 시나리오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목적이 뚜렷한 수사이며, 다시 말해 표적수사입니다. 검찰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네, 사회의 정의를 세우네 이야기를 하나, 결국 본다면 한 사람의 정치적 생명을 짓밟기 위한 (여론 재판도 포함한) 표적 수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검찰에선 그러더군요. 전직 대통령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다했다고요. 네, 당연합니다. 변호사가 빤히 보고 있는 앞에서 대통령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형식적인 예우는 당연히 지켰겠지요. 그런데 수사의 목적 자체가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수사 자체가 대통령에 대한 모욕이며, 그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고로, 이 나라의 검찰은 아직도 권력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