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차
발상태가 너무 메롱이라서 오늘은 하루 쉬며 브루고스에 머물렀다. 쉰다고 쉬긴 했는데. 새벽이 떠나는 순례자. 낮에 텅빈 알베르게. 점심쯤부터 벌써 도착하는 지친 순례자들을 보면서 마음이 같이 분주해지던 하루, 열하루만의 휴식이었는데도 편하지 만은 았았다. 내일은 잘 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합이 잔뜩 들어가게 된다.
산티아고 길을 걷다보면 물자도 부족하고 인맥도 부족하고 인프라도 부족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사랑이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원시인처럼 그래서 자연스럽게 작은 일에 치사해지고 작은것에 영치가 없어지고 작은 이익에 본성을 드러내곤 한다.
쉬면서 넷플릭스 에이트쇼를 몇편 봤다. 자원이 없고 단순한 하루의 모습.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여기 순례길의 풍경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생각되어 끔찍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나는 권위도 명함도 스펙도 없다. 길 위의 사림들은 한 인간으로서 모두 동일하다. 보잘것없는 상황과 관계 속에서도 나를 지키는 법을 아는것. 내 마음을 풍성하게 하는 것. 내 진짜 모습을 보듬어 주는 것. 순례길에서 날마다 마주하게 되는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