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은근히 쑥스러움을 타는고로
그와의 통화는 아주 짧았지만,
맹랑한(?) 그의 목소리를 듣기에는 충분했다.
실은 그의 나이가 몇살인지도 모르면서
답글로 보낸 메일에는 김양수.. '형님'이라는 수식어를 끼워 넣으며
그의 친분관계 울타리로 살짝꿍 끼여들고자 꽁수를 부리기도 했다.
화려한 필체나, 뛰어난 경력도
진지하게 쓴 글을 이기진 못한다는 생각을 다시 들게 하는 글이었다.
3달 동안 받아온 외고는 근근이 실패였으나
이번의 성공으로 신입사원은 체면치례를 하게 되었다.
저작권에 구애받지 않고
이곳 유천닷컴에 그의 글을 올려본다.
느끼세요~~
아버지와 야구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항상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침 7시면 포마드를 발라 뒤로 넘긴 머리에 양복을 단정히 입고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으며 아이들이 학교갈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 있어서 단순한 존경이나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동경에 가까웠다. 모든 아버지들의 아들들이 그렇듯이.
아버지는 실생활 면에서도 상당히 규칙적이었다. 옆집이나 윗집 아저씨가 새벽에 술에 쩔어 현관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는 날들 속에서, 아버지는 항상 저녁 6시 30분이 되면 기사 아저씨가 몰고 온 자동차에서 내려 집에 도착하고, 아이들과 어머니의 인사를 받은 후 세면을 하고 다시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었다. 그것은 때로 너무나 기계적이어서 원래 저렇게 프로그램되어 있는 사람이 아닌가, 라는 발칙한 생각을 하던 때도 있었다. 아무튼 아버지는 집에 돌아왔을 때 뛰어나와 인사를 하는 자식들에게 항상 지폐를 쥐어줬으므로 나는 항상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리는 쪽이었다. 그렇다면 취미 생활을 또 어떤가. 아버지의 가장 큰 취미는 작은 자신의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서예를 하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고상한 취미인가?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정말 내외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고상한’ 류 외에 매니아적인 취향의 취미를 하나 더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야구였다. 베이스볼. 초록색 다이아몬드 위로 아홉 명의 선수들이 이리뛰고 저리뛰는 스포츠 말이다.
아버지의 야구 사랑은 참으로 대단했다. 아버지는 금쪽처럼 아끼던 둘째 아들을 동대문 야구장에서 잃어버려도 셋째 아들을 데리고 야구장에 다녔고(물론 둘째 형은 찾았다), 나의 어머니이자 그의 부인이 부부싸움 끝에 짐을 싸들고 친정으로 확 내려가던 날에도 소주를 마시며 일요일 오후 2시의 야구를 보았다. 매년 새해가 되면 아버지는 아직 어린 막둥이인 나를 당신이 응원하는 야구단의 어린이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일요일이면 나에게 야구점퍼와 모자를 씌운 후 야구장, 그게 여의치 않으면 동네 목욕탕이라도 가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았다. 연초에 나오는 프로야구 선수연보를 구입해 줄줄 외는 것은 아버지의 조촐한 신년 행사 중 하나. 이제까지 내가 본 아버지의 얼굴 중에서, 가장 망연자실한 얼굴을 보게 된 날은, 내가 배정받은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없었음을 아버지가 알게된 날이다.
아버지는 돈을 돌처럼 벌어오진 못했지만 흔히 말하는 대기업의 임원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다. 쉽게 말해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성공한, 흔하지도 흔치 않기도 한 케이스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라는 걸, 아버지의 자동차가 항상 까만색 최고급 세단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깊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평생 몸바쳐 일하던 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늦둥이인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고, 아버지가 예순 몇 살이 되던 해, 회사를 그만두면 막내는 어쩌냐며 견딜 때까지 견디라고 고집하던 어머니가 잠시 여행을 떠나던 날, 아버지는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집으로 왔다. 아버지의 저녁상을 차려드린 내가 아버지 옆에 앉아 TV를 보는데, 아버지가 술 한잔을 드시며 말씀하셨다. 이젠, 너무 지쳤다고. 잘 하셨어요. 나는 그 말밖에 아버지에게 드릴 말씀이 없었다. 그때부터 아버지, 그리고 우리집은 조금씩, 하지만 급격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명절이 되면 손님으로 앉을 자리가 없었던 집안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고, 처치곤란이었던 명절 선물 따위는 우리집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평소 타보기는 커녕 잘 구경도 하지 못했던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처음 버스를 타던 날, 파출소에 끌려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버스비가 얼마인지 몰라서 회수권함에 만원짜리를 넣었는데, 누군가가 그걸 보고 간첩이라고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정말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조금씩 달라져갔다. 포마드를 바른 염색한 검은 머리는 어느새 무성한 백발로 변해갔고, 밤마다 드시던 레몬향 가득한 진토닉은 소주잔으로 바뀌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먼 나라로 떠난 형제들은 1년에 한 번쯤 의식적으로 안부 전화만을 하고, 어머니는 보험설계사로 생활비를, 나는 술집 주방에서 치킨을 튀기며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어느덧 천원짜리를 십만원짜리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노인용 지하철 무료이용권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아버지는 친구분들과 점심부터 술 한잔을 하시고 종로통을 걷다가 발을 헛디뎌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어느해 여름이 시작되던 즈음이었다. 그리고 가을이 끝날 때까지 아버지는 늙어서 잘 붙지 않는 부러진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매일매일 야구중계만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늦은 가을날, 내게 말했다. 막내야, 야구장 가자. 코리안 시리즈가 있던 날이었다.
코리안 시리즈의 결승전. 아버지를 모시고 겨우겨우 야구장에 갔다. 아버지는 연신 팩소주를 마시며 몇 년만에 찾은 야구장의 열기에 흥겨워했고,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우리팀은 졌다. 나이트 게임이 끝난 밤 10시, 쌀쌀한 날씨 속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택시를 잡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길가에 세워두고 나는 택시를 잡기 위해 거리로 뛰어나갔다. 한참을 실랑이 끝에 빈 택시 하나를 잡아두고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때, 하늘에서는 그 해의 첫 눈인 싸리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오세요! 소리치자 아버지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어두운 거리의 인파 속에서 절룩, 절룩 나를 향해 열심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버지를 뒷자리에 태우고, 옆에 앉은 나는 얼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내가 왜 울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시절, 거인처럼 위대하던 당신의 초라해진 모습을 내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참았던 눈물이 모두 흘렀지만 소리내지 않으려고 꺽꺽거렸다. 아버지는 내 눈물을 보면서도 왜 우는지 묻지 않았다. 물었어도,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조용히 내 어깨만 두드렸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나는 몰랐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야구장이 되었을 줄은.
오랜 시간이 지났다. 고상한 신사에서 직장 없는 노인네로 전락해 수년을 보낸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라는 슬프고도 영예로운 수식어와 함께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매년 가을이면 아버지의 묘 앞에 앉아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던 소주를 산소에서 알코올 냄새가 날 만큼 많이 뿌려대곤 한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것, 하늘에서라도 마음껏 드시라고. 그런데 야구에 대해서는 이상할 만큼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주만큼이나 아버지가 좋아했던 야구를 말이다. 다음에 산소에 갈 때는, 올해의 야구선수 연보를 한 권쯤 가지고 가야할 것 같다. 볼 수 있으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비석 앞에 그 책을 한권 얹어놓고 돌아와야 할 것 같다.
글/김양수(월간 PAPER 기자, mup123@dreamwiz.com)
그와의 통화는 아주 짧았지만,
맹랑한(?) 그의 목소리를 듣기에는 충분했다.
실은 그의 나이가 몇살인지도 모르면서
답글로 보낸 메일에는 김양수.. '형님'이라는 수식어를 끼워 넣으며
그의 친분관계 울타리로 살짝꿍 끼여들고자 꽁수를 부리기도 했다.
화려한 필체나, 뛰어난 경력도
진지하게 쓴 글을 이기진 못한다는 생각을 다시 들게 하는 글이었다.
3달 동안 받아온 외고는 근근이 실패였으나
이번의 성공으로 신입사원은 체면치례를 하게 되었다.
저작권에 구애받지 않고
이곳 유천닷컴에 그의 글을 올려본다.
느끼세요~~
아버지와 야구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항상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침 7시면 포마드를 발라 뒤로 넘긴 머리에 양복을 단정히 입고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으며 아이들이 학교갈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 있어서 단순한 존경이나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동경에 가까웠다. 모든 아버지들의 아들들이 그렇듯이.
아버지는 실생활 면에서도 상당히 규칙적이었다. 옆집이나 윗집 아저씨가 새벽에 술에 쩔어 현관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는 날들 속에서, 아버지는 항상 저녁 6시 30분이 되면 기사 아저씨가 몰고 온 자동차에서 내려 집에 도착하고, 아이들과 어머니의 인사를 받은 후 세면을 하고 다시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었다. 그것은 때로 너무나 기계적이어서 원래 저렇게 프로그램되어 있는 사람이 아닌가, 라는 발칙한 생각을 하던 때도 있었다. 아무튼 아버지는 집에 돌아왔을 때 뛰어나와 인사를 하는 자식들에게 항상 지폐를 쥐어줬으므로 나는 항상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리는 쪽이었다. 그렇다면 취미 생활을 또 어떤가. 아버지의 가장 큰 취미는 작은 자신의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서예를 하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고상한 취미인가?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정말 내외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고상한’ 류 외에 매니아적인 취향의 취미를 하나 더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야구였다. 베이스볼. 초록색 다이아몬드 위로 아홉 명의 선수들이 이리뛰고 저리뛰는 스포츠 말이다.
아버지의 야구 사랑은 참으로 대단했다. 아버지는 금쪽처럼 아끼던 둘째 아들을 동대문 야구장에서 잃어버려도 셋째 아들을 데리고 야구장에 다녔고(물론 둘째 형은 찾았다), 나의 어머니이자 그의 부인이 부부싸움 끝에 짐을 싸들고 친정으로 확 내려가던 날에도 소주를 마시며 일요일 오후 2시의 야구를 보았다. 매년 새해가 되면 아버지는 아직 어린 막둥이인 나를 당신이 응원하는 야구단의 어린이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일요일이면 나에게 야구점퍼와 모자를 씌운 후 야구장, 그게 여의치 않으면 동네 목욕탕이라도 가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았다. 연초에 나오는 프로야구 선수연보를 구입해 줄줄 외는 것은 아버지의 조촐한 신년 행사 중 하나. 이제까지 내가 본 아버지의 얼굴 중에서, 가장 망연자실한 얼굴을 보게 된 날은, 내가 배정받은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없었음을 아버지가 알게된 날이다.
아버지는 돈을 돌처럼 벌어오진 못했지만 흔히 말하는 대기업의 임원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다. 쉽게 말해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성공한, 흔하지도 흔치 않기도 한 케이스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라는 걸, 아버지의 자동차가 항상 까만색 최고급 세단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깊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평생 몸바쳐 일하던 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늦둥이인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고, 아버지가 예순 몇 살이 되던 해, 회사를 그만두면 막내는 어쩌냐며 견딜 때까지 견디라고 고집하던 어머니가 잠시 여행을 떠나던 날, 아버지는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집으로 왔다. 아버지의 저녁상을 차려드린 내가 아버지 옆에 앉아 TV를 보는데, 아버지가 술 한잔을 드시며 말씀하셨다. 이젠, 너무 지쳤다고. 잘 하셨어요. 나는 그 말밖에 아버지에게 드릴 말씀이 없었다. 그때부터 아버지, 그리고 우리집은 조금씩, 하지만 급격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명절이 되면 손님으로 앉을 자리가 없었던 집안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고, 처치곤란이었던 명절 선물 따위는 우리집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평소 타보기는 커녕 잘 구경도 하지 못했던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처음 버스를 타던 날, 파출소에 끌려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버스비가 얼마인지 몰라서 회수권함에 만원짜리를 넣었는데, 누군가가 그걸 보고 간첩이라고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정말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조금씩 달라져갔다. 포마드를 바른 염색한 검은 머리는 어느새 무성한 백발로 변해갔고, 밤마다 드시던 레몬향 가득한 진토닉은 소주잔으로 바뀌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먼 나라로 떠난 형제들은 1년에 한 번쯤 의식적으로 안부 전화만을 하고, 어머니는 보험설계사로 생활비를, 나는 술집 주방에서 치킨을 튀기며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어느덧 천원짜리를 십만원짜리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노인용 지하철 무료이용권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아버지는 친구분들과 점심부터 술 한잔을 하시고 종로통을 걷다가 발을 헛디뎌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어느해 여름이 시작되던 즈음이었다. 그리고 가을이 끝날 때까지 아버지는 늙어서 잘 붙지 않는 부러진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매일매일 야구중계만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늦은 가을날, 내게 말했다. 막내야, 야구장 가자. 코리안 시리즈가 있던 날이었다.
코리안 시리즈의 결승전. 아버지를 모시고 겨우겨우 야구장에 갔다. 아버지는 연신 팩소주를 마시며 몇 년만에 찾은 야구장의 열기에 흥겨워했고,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우리팀은 졌다. 나이트 게임이 끝난 밤 10시, 쌀쌀한 날씨 속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택시를 잡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길가에 세워두고 나는 택시를 잡기 위해 거리로 뛰어나갔다. 한참을 실랑이 끝에 빈 택시 하나를 잡아두고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때, 하늘에서는 그 해의 첫 눈인 싸리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오세요! 소리치자 아버지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어두운 거리의 인파 속에서 절룩, 절룩 나를 향해 열심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버지를 뒷자리에 태우고, 옆에 앉은 나는 얼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내가 왜 울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시절, 거인처럼 위대하던 당신의 초라해진 모습을 내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참았던 눈물이 모두 흘렀지만 소리내지 않으려고 꺽꺽거렸다. 아버지는 내 눈물을 보면서도 왜 우는지 묻지 않았다. 물었어도,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조용히 내 어깨만 두드렸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나는 몰랐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야구장이 되었을 줄은.
오랜 시간이 지났다. 고상한 신사에서 직장 없는 노인네로 전락해 수년을 보낸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라는 슬프고도 영예로운 수식어와 함께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매년 가을이면 아버지의 묘 앞에 앉아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던 소주를 산소에서 알코올 냄새가 날 만큼 많이 뿌려대곤 한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것, 하늘에서라도 마음껏 드시라고. 그런데 야구에 대해서는 이상할 만큼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주만큼이나 아버지가 좋아했던 야구를 말이다. 다음에 산소에 갈 때는, 올해의 야구선수 연보를 한 권쯤 가지고 가야할 것 같다. 볼 수 있으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비석 앞에 그 책을 한권 얹어놓고 돌아와야 할 것 같다.
글/김양수(월간 PAPER 기자, mup123@dreamwiz.com)
나의 faith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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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 아직 살아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