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의 미스터 멋쟁이는 없다
봄날이긴 해도, 34도의 불볕이 내려쬐는 오후였다. 나는 40분째 후배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일기예보를 못본 탓에 보온이 잘 되는 긴팔 옷을 입고 있었다. 째각째각. 손등을 덮는 디자인의 소매 속에서, 시계 속의 수은전지가 새고 있는 느낌이었다. 형, 오래 기다렸죠? 이윽고 나타난 후배는 - 시원한 반팔 차림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화났어요? 화는… 났지만, 그러나 나는 말없이 웃어 주었다. 34도의 불볕이라고는 해도, 뭐랄까 봄이니까. 즉 봄은 화를 내기에 적당한 계절은 아니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개구리도 강아지도, 그리고 곰도, 봄에는 그 누구도 화를 내지 않는다. 즉, 그런 거니까.
삼겹살을 먹자고? 네, 삼겹살이요. 더 이상 나쁠 수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더위 속에서 삼겹살을 생각하다니. 40분이나 늦은 주제에, 라고는 해도 – 말은 “글쎄, 냉면 같은 건 어떨까?”라고 돌려서 했다. 형, 거기 녹차냉면도 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 한 잔의 녹차 같은 편안한 표정을 보는 순간, 결국 삼겹살을 먹는 수밖엔 없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었다. 이런 스타일의 인간에게, 나는 언제나 무릎을 꿇는다. 도리가 없다. 도리 없이, 녹차냉면을 판다는 그 삼겹살집은 아주 가까운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아니, 나빴다. 이글거리는 불판 앞에서 나는 더욱 땀을 흘렸고, 마침 그 집의 에어컨은 고장이 난 상태였다. 조만간 꼭 고치겠습니다. 라고는 해도, 어디 꼭, 또 올 일이 있어야 말이지. 나는 담배를 고쳐 물었다. 탁 탁, 타닥. 불판 위에선 살점들이 익어가고,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그러니까 강물엔, 유람선도 떠, 있겠지. 나는 또 다시 담배를 고쳐 물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식으로 늙어가는 것이구나 - 라는 생각을, 했다. 탁 탁, 타닥. 에어컨을 대신한 늙은 선풍기가, 자신의 목을 열심히 꺾고 있었다. 반전(反轉)은 그때 일어났다. 아임 드리밍 오브 화이트, 크리스마스.
팻 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울려퍼진 것은 그때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뭐랄까, 이래도 되나 싶은 정도의 선곡이라면 선곡이었지만, 그 노래엔 분명 묘한 감동과 힘이 서려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후배도 나도 조금 전과는 분명 다른 기분으로 고기를 씹고 있었다. 나는 - 조금은 시원해진 기분이었고, 얼마쯤 모든 걸 용서하는 마음이 되었으며, 마치 거짓말처럼 - 눈이 왔으면 좋겠다, 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눈처럼 떨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뒤덮혀, 돼지의 살점들조차 순한, 양고기로 변한 기분이었다. 너무 더워하시는 것 같아, 겨울노래를 틀어봤습니다. 어땠습니까? 쑥스러운 표정으로 주인이 얘기했다. 팻 분이라… 좋지요. 카드 전표에 사인을 하며, 나는 생각했다. 결국, 모든 구원은 반전(反轉)이다.
팻 분은 1934년 플로리다의 잭슨 빌에서 태어났다. 1953년부터 가수로써 공식적인 활동을 벌인 그는 - 감미로운 목소리와 독실한 신앙생활로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는 가스펠의 총아였으며, 미국인의 우상이었다. 그의 캐럴은 지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캐럴의 표본이며, 그는 지난 45년간 - 미국의 가스펠과 크리스마스와 기독교의 간판스타였다. 그리고 97년 - 그는 갑자기 체인과 징이 박힌 가죽옷을 입고 나타나 헤비메탈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의 앨범 타이틀은 <더 이상의 미스터 멋쟁이는 없다> 였으며, 환갑을 넘어 변신한 이 미스터 멋쟁이에게 전미수녀협회는 악마의 포교를 받은 이단자란 낙인을 찍어주었다. 더불어 그는 전미교회연합에서 발표한 ‘자녀에게 가까이 하게 해서는 안될 인물’ 탑 텐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려 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 난 늘 이게 하고 싶었어요. 팻 분 자신은 현재 더 없이 행복할 따름이라고 스스로를 대변했다. 할렐, 루야!
삶이 힘들다 느껴질 때 나는 늘 팻 분을 생각한다. 아직 우리에겐 반전이 남아있다는 기막힌 사실, 아직 우리에게 그런 무기가 남아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 팻 분은 스스로의 45년을 허물어 증명해 보여주었다. 나는 상상한다. 45년 동안 묵묵히 소설을 써대다 어느날 까꿍, 어부가 되는 내 모습을. 30년 동안 묵묵히 회사를 다니다 어느날 까꿍, 레슬러나 만화가로 변신한 당신의 모습을. 20년을 한결같이 주부였다가 어느날 까꿍, 라틴 댄스의 여왕으로 등극하는 당신의 스텝을 – 나는 생각한다. 탁 탁, 타닥. 인생의 반전을 생각하면, 지루했던 우리의 삶도 그 발걸음이 달라진다. 아직 당신을, 아무도 모른다. 아직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은밀하게, 한 45년, 당신은 어떤 준비를 해 나가고 있는가? 모든 구원은 반전이다. 좋은 소설에는 멋진 반전이 있고, 멋진 삶에는 좋은 반전이 있다. 자, 모두를 배신할 준비는 되어있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에게 반전이 남아있다면, 더 이상의 미스터 멋쟁이는 없다. 그런 생각이다.
소설가 박민규
*이번주 사보에 실리는 그의 원고-
봄날이긴 해도, 34도의 불볕이 내려쬐는 오후였다. 나는 40분째 후배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일기예보를 못본 탓에 보온이 잘 되는 긴팔 옷을 입고 있었다. 째각째각. 손등을 덮는 디자인의 소매 속에서, 시계 속의 수은전지가 새고 있는 느낌이었다. 형, 오래 기다렸죠? 이윽고 나타난 후배는 - 시원한 반팔 차림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화났어요? 화는… 났지만, 그러나 나는 말없이 웃어 주었다. 34도의 불볕이라고는 해도, 뭐랄까 봄이니까. 즉 봄은 화를 내기에 적당한 계절은 아니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개구리도 강아지도, 그리고 곰도, 봄에는 그 누구도 화를 내지 않는다. 즉, 그런 거니까.
삼겹살을 먹자고? 네, 삼겹살이요. 더 이상 나쁠 수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더위 속에서 삼겹살을 생각하다니. 40분이나 늦은 주제에, 라고는 해도 – 말은 “글쎄, 냉면 같은 건 어떨까?”라고 돌려서 했다. 형, 거기 녹차냉면도 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 한 잔의 녹차 같은 편안한 표정을 보는 순간, 결국 삼겹살을 먹는 수밖엔 없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었다. 이런 스타일의 인간에게, 나는 언제나 무릎을 꿇는다. 도리가 없다. 도리 없이, 녹차냉면을 판다는 그 삼겹살집은 아주 가까운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아니, 나빴다. 이글거리는 불판 앞에서 나는 더욱 땀을 흘렸고, 마침 그 집의 에어컨은 고장이 난 상태였다. 조만간 꼭 고치겠습니다. 라고는 해도, 어디 꼭, 또 올 일이 있어야 말이지. 나는 담배를 고쳐 물었다. 탁 탁, 타닥. 불판 위에선 살점들이 익어가고,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그러니까 강물엔, 유람선도 떠, 있겠지. 나는 또 다시 담배를 고쳐 물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식으로 늙어가는 것이구나 - 라는 생각을, 했다. 탁 탁, 타닥. 에어컨을 대신한 늙은 선풍기가, 자신의 목을 열심히 꺾고 있었다. 반전(反轉)은 그때 일어났다. 아임 드리밍 오브 화이트, 크리스마스.
팻 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울려퍼진 것은 그때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뭐랄까, 이래도 되나 싶은 정도의 선곡이라면 선곡이었지만, 그 노래엔 분명 묘한 감동과 힘이 서려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후배도 나도 조금 전과는 분명 다른 기분으로 고기를 씹고 있었다. 나는 - 조금은 시원해진 기분이었고, 얼마쯤 모든 걸 용서하는 마음이 되었으며, 마치 거짓말처럼 - 눈이 왔으면 좋겠다, 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눈처럼 떨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뒤덮혀, 돼지의 살점들조차 순한, 양고기로 변한 기분이었다. 너무 더워하시는 것 같아, 겨울노래를 틀어봤습니다. 어땠습니까? 쑥스러운 표정으로 주인이 얘기했다. 팻 분이라… 좋지요. 카드 전표에 사인을 하며, 나는 생각했다. 결국, 모든 구원은 반전(反轉)이다.
팻 분은 1934년 플로리다의 잭슨 빌에서 태어났다. 1953년부터 가수로써 공식적인 활동을 벌인 그는 - 감미로운 목소리와 독실한 신앙생활로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는 가스펠의 총아였으며, 미국인의 우상이었다. 그의 캐럴은 지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캐럴의 표본이며, 그는 지난 45년간 - 미국의 가스펠과 크리스마스와 기독교의 간판스타였다. 그리고 97년 - 그는 갑자기 체인과 징이 박힌 가죽옷을 입고 나타나 헤비메탈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의 앨범 타이틀은 <더 이상의 미스터 멋쟁이는 없다> 였으며, 환갑을 넘어 변신한 이 미스터 멋쟁이에게 전미수녀협회는 악마의 포교를 받은 이단자란 낙인을 찍어주었다. 더불어 그는 전미교회연합에서 발표한 ‘자녀에게 가까이 하게 해서는 안될 인물’ 탑 텐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려 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 난 늘 이게 하고 싶었어요. 팻 분 자신은 현재 더 없이 행복할 따름이라고 스스로를 대변했다. 할렐, 루야!
삶이 힘들다 느껴질 때 나는 늘 팻 분을 생각한다. 아직 우리에겐 반전이 남아있다는 기막힌 사실, 아직 우리에게 그런 무기가 남아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 팻 분은 스스로의 45년을 허물어 증명해 보여주었다. 나는 상상한다. 45년 동안 묵묵히 소설을 써대다 어느날 까꿍, 어부가 되는 내 모습을. 30년 동안 묵묵히 회사를 다니다 어느날 까꿍, 레슬러나 만화가로 변신한 당신의 모습을. 20년을 한결같이 주부였다가 어느날 까꿍, 라틴 댄스의 여왕으로 등극하는 당신의 스텝을 – 나는 생각한다. 탁 탁, 타닥. 인생의 반전을 생각하면, 지루했던 우리의 삶도 그 발걸음이 달라진다. 아직 당신을, 아무도 모른다. 아직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은밀하게, 한 45년, 당신은 어떤 준비를 해 나가고 있는가? 모든 구원은 반전이다. 좋은 소설에는 멋진 반전이 있고, 멋진 삶에는 좋은 반전이 있다. 자, 모두를 배신할 준비는 되어있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에게 반전이 남아있다면, 더 이상의 미스터 멋쟁이는 없다. 그런 생각이다.
소설가 박민규
*이번주 사보에 실리는 그의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