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글의 제목은 떠나라! (죽지 않는다) 로 잡아 봤습니다.
첫번째 글에서 이런저런 현실적인 어려움과 문제들에 대해 많이 썼지만 쓰려고 들면 더많은 문제들이 있지요.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를 잘 극복하면서 좋은 결과를 얻고 돌아갈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청년들을 상담하면서 꼭 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경주마 이야기 입니다.
경주마를 생각해 보세요. 경주마는 항상 눈가리개를 하고 있지요.
앞만 보고 정신없이 한 곳만 뛰게 하기 위해서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한국에서 우린 눈가리개를 하고 뛰는 경주마와 똑같습니다.
누가 눈가리개를 채워놨고 어디로 뛰는건지 또 누가 내 위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정신없이 뛰도록 재촉하는지도 모르는데 앞 말의 꽁지만 쳐다보면서 죽어라고 뛰고 또 뜁니다.
그 길이 내가 가고 싶은 길일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고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면서 남이 뛰니까 나도 뛰고 뒤에서 쫓아오니까 또 뛰고, 뛰고 또 뛰고...
호주로 온다는 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집니다.), 외국에 나가 본다는 것은 바로 이 눈가리개를 잠시 떼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정신없이 어딘가로 뛰기만 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눈가리개를 떼어내는 것입니다.
눈가리개를 떼어내면 어떻게 될까요?
"어? 뭐야? 저 옆에 있는 길은? 길이 내가 뛰던 길만 있는게 아니었잖아? 어? 왼쪽에도 길이 있네? 하나도 아니고 엄청나게 많잖아? 저 많은 길들에서 뛰고 있는 쟤네들은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호주 오는 대부분의 청년들이 호주에 와서 눈가리개를 떼어냅니다. 아니, 떼어지죠.
그런데 희안한것은 눈가리개를 떼어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앞만 바라본다는 겁니다.
눈을 굴려서 옆을 보면 마치 죽는것처럼 눈가리개도 없는데 계속해서 앞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어쩌면 더 열심히) 겁먹은 송아지 눈마냥 그렇게 있다가 12개월뒤에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자기 손으로 눈가리개를 철썩하고 붙이고 다시 또 정신없이 어딘가로 뜁니다.
밖에 나왔으면, 눈가리개를 기껏 떼어냈으면 옆을 봐야죠.
오른쪽도 좀 보고, 왼쪽도 좀 보고...그래야 그동안 가려져서 안보였던 무언가를 찾을수 있죠.
눈 돌리는 자체가 두려운 겁니다. 뭔가 새로움을 발견한다는게 무서운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경직되어 있고 위축되어 있고 정형화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옆에 있는 수많은 길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뛰어왔던 - 왜 뛰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던 - 그 길과는 전혀 다른 그런 길들입니다.
그중에 어떤 길이 내게 정말 잘 맞고 내가 뛰고 싶었던, 내가 가장 잘 뛸수 있는 길인지 뛰어봐야, 아니, 쳐다라도 봐야 찾든지 말든지 할것 아니겠습니까?
그 길은 같이 뛰는 다른 말들이 너무 많아서 밀리던 그런 길도 아니고 험난하기만 했던 자갈길이 아닐수도 있고 더 넓을 수도 있고 함께 뛰고 싶던 다른 말들이 이미 가고 있어서 내 손을 붙잡아 줄수도 있는 그런 길일수도 있습니다.
쳐다봐야죠, 그리고 그 길들을 하나씩 달려봐야죠, 그래서 어느 길이 내게 정말 맞는지, 어느 길이 정말 내가 찾고 싶었던, 달리고 싶었던 길인지 찾아봐야죠, 분명히 있을텐데...바로 '그 길'이...내가 목마르게 찾던, 뭔지 잘은 몰랐지만 내 마음속에서 갈망하고 또 갈망하던...나의 가치를 제대로 표현하고 내 삶의 의미를 찾게 해줄 바로 그 길이요......
한국에서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과 의식구조를 고스란히 그대로 간직한채 '여기도 뭐 별 볼일없네' 하고 불평하고 자신을 또 원망하고 비하하며 12개월, 시간만 보내고 다시 한국에 가서 눈가리개를 또 채우고 답답해하면서도 어쩔수없이 또 뛰어야하는 그 길로 들어서는게 대부분의, 정말 대부분의 이곳에 오는 청년들의 실상입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 13년동안 청년상대로 목회하시면서 내린 결론이 이겁니다.
"여기 오는 청년들은 자신이 부족한것도 알고 더 배워야하고 더 경험해야하고 인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도 안다. 아주 잘안다. 그리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것은 의지력이 약하다.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만다."
다른 길을 찾는 방법이요? 바로 내 길을 찾는 방법이요?
우선, 앞서 말했듯이 두려움을 이기고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냥 눈동자만 살짝 굴려보면 됩니다. 오른쪽 한번, 그리고 왼쪽 한번, 그러면 됩니다.
그다음 발견했다면 과감히 지금의 길을 벗어나서 우선 바로 옆 길로 들어서 보는 겁니다. 한번쯤 뛰어보고 다시 또 옆길로도 한번, 그러다보면 계속 다음길, 다음길이 아니라 바라보는 요령이 생겨서 세번째 다음길, 왼쪽으로 일곱번째 있는길 등등 점점 내 마음에 보이는 길을 골라서 뛰어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순간 발견하는 거죠. "빙고!"
지난번 글에 썼듯이 호주에 처음와서 기본적으로 처음에 영어학교 다니고 적응하고 돈 떨어질때쯤 되는 3개월까지는 아직 다른 길로 들어서 본게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3개월, 즉 영어학교가 마치기전에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해서 영어학교가 마치자 마자 즉시 떠나는 겁니다.
돈 다 떨어지기 전에, 당장 생활비가 문제되기 전에 버스표 사놓고 학교 땡하면 바로 떠나는 겁니다.
어디라도 좋습니다. 일단 다른 큰 도시가 되겠죠. 떠나는 자체가 중요합니다.
3개월이 넘으면 그 지역 생활에 이미 적응이 되고 안주가 되고 돈 문제등도 겹쳐서 떠나기가 아주 어려워집니다. 두려워지는거죠.
아직 뭘 모를때 저질러야 합니다.
일자리도 떠나서 도착한 다른 지역에서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안하면 정말이지 호주에서 두지역도 못 다녀보고 한국가게 됩니다.
호주에 '살려고' 온거 아니잖습니까?
여기 오는 청년들중 10명중 약 2-3명만이 비자를 제대로 사용하고 또 떠나온 의미를 제대로 찾고 돌아갑니다.
다들 그러죠. 일자리가 없다고. 무작정 떠났다가 일자리 못 구하면 어떻하냐고, 돈 떨어지면 끝장인데 뭘 믿고 떠나느냐고.
일자리가 도시만큼 없겠습니까? 모두 다 몰려있어서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하는 도시만큼 없겠느냐구요?
여기 오래 있다보니까 청년들이 처음에 와서 돌아가기까지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볼수 있게 됩니다.
위의 2-3명에 해당하는 청년들에게 물어봅니다.
떠나보니까 정말 일자리가 없더냐? 죽을것 같더냐? 역시 큰 도시가 안정적인 해결책이더냐?
대답은? "당근으로 아니죠!" 그리고 "안 떠났으면 큰일 날뻔 했어요. 빈손으로 돌아갈뻔 했다는 말이죠. 왜 남들이 하는것과 똑같은 것만 고집해야 하죠? 그러니까 일자리가 없고 기회가 없죠. 떠나보면 내가 보지 못하던것을 볼수 있고 그러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마음상태가 달라져서 남들이 생각지 못하던 것들에서 나의 기회를 찾을수 있어요. 충분히 먹고 살구요, 여행도 하구요 다 살게 되어 있어요. 그게 다 나를 만드는 거구요!"
'다 살게 되어 있어요' - 이게 답입니다. 제가 만들어낸 말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길이 보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른게 아니라 주변에 남들 하듯이 똑같이 외국에 나와서 까지 편하게 안주하려고 하지 말고 남들 대부분 안하려는걸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그냥 버스표 사서 다른 곳으로 (유명한 큰 도시가 아니면 더 좋겠지만 일단 큰 도시라도) 떠나는 겁니다. 초기 3개월 이내에요. 그게 다 입니다.
그 다음은 거기서 생각하면 되고 일해서 돈 벌면 또 떠나고 또 떠나고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달라져 가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심심치않게 이곳에서 호주를 완전 일주하고 돌아가는 청년들을 봅니다. 반바퀴도 아니고 일주요.
최근에 한 여자청년이 (남자도 아닌 여자청년이) 호주를 완전히 일주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시작은 브리스번이었고 갖고 온 돈이 부족해서 영어학교도 못 다녔습니다.
처음 두 달은 떠나길 주저하더군요. 역시 불안하고 또 영어도 안되고 한다는 이유로요.
두 달이 되니까 그나마 조금 갖고 온 돈도 떨어지고 당장 일자리를 못 구하면 먹고 사는것 자체가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죠. 잘 안구해졌구요. 이런저런 몇가지 일을 어떻게 구해서 해봤지만 '내가 도대체 여기서 이 짓 하려고 왔나' 하는 마음만 자꾸 들고...제가 권했습니다. 그냥 떠나라. 무서워도 떠나봐라.
요즘 유행인 농장에 들어갔습니다. 카불처 라는 곳에 있는 딸기 농장이었죠.
언제 농장일 해봤겠습니까? 거기서 '딸신' 되었습니다. (오시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압니다. 딸기 최고 잘 따면 딸기의 신, 딸신이고 파 잘따면 파신이고...-.-;; 농장일 해본 사람은 여기서 농산물 못 사먹습니다. 파 사려고 하면 '이 파는 어떤 녀석이 또 별 쳐다보고 울면서 딴 파일까' 싶어서요.)
그렇게 모든 돈으로 남들 I-POD사고 술로 날릴때 꽁꽁 모아서 여행 떠났습니다.
여행 한 이십일 하니까 돈 떨어졌죠. 주변에 있는 아무 농장에나 닥치는대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해본 경험이 있다보니 업종이 달라도 바로 손에 익을수 있었습니다. 어딜가나 바로 '신'이 되었고 돈 모을수 있었습니다.
또 떠나서 여행하고 또 어딘가에서 일하고, 일도 꼭 농장이 아니라 어디 도시에서 축제를 하면 거기 자원해서 칩스 튀겨서 파는 일도 하고, 청소일도 하고 (물론 진짜 호주인들과 함께요)...그렇게 해서 9개월만에 호주를 일주하고 뉴질랜드까지 다녀왔습니다.
새까매져서 돌아온 그 청년에게 물었죠. "죽을것 같더냐?" "무슨 말씀. 나 이제 뭐든지 다 할수 있을것 같아요. 한국에 가서도 남들과 다르게 살꺼예요. 내가 왜 토익 만점 받아서 대기업 들어가겠다고 머리 터지게 싸우며 살아요?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갈 길을 찾았어요. 내 인생은 달라질꺼예요."
한국에서 정말 평범했던, 부족하기까지 했기에 여기 와야만 했던 그런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해낸 일입니다.
한국에서와 똑같이, 여기 대부분의 다른 청년들과 똑같이 영어학교나 코스 바꿔가며 다니고 너무 길게 끊어온것 후회하며 그것 불법으로 남에게 팔러 다니고 밤이면 한국인들끼리 모여서 파티 열어서 술이나 마시고 (요즘 정말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왔을때만해도 감히 식당에서 소주 못 사먹었습니다. 돈이 없어서요. 근데 요즘은 하룻밤에 $200-300 술값으로 지불하는 청년들 부지기수로 봅니다. 이래도 돈이 없고 불안해서 못 떠난다고 말할수 있습니까?) 머리 터지게 똑같은 일, 똑같이 경쟁해가며 $8 받아서 먹고 사는걸로 고생하다가 나중에 겨우 멜번이나 한번, 뉴질랜드나 보름 갖다오고 돌아가겠습니까?
매년 12월이면 시드니에서 KOSTA라는 기독교 청년 집회가 열립니다.
교파에 상관없이 전세계적으로 기독교인 청년들을 모아놓고 기독교인으로 한국에서 정치, 경제, 종교, 사회적으로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와서 청년들에게 도전을 주는 집회입니다.
강사들이 자비로 와서 하는 것이기에 나라별로 코스타가 다 있어도 강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전에 제가 호주 코스타에 갔을때 일입니다. 강사님들이 한결같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도 할수 있다!" 였습니다. 너도 할 수 있다. 힘내봐라. 너도 잘 될수 있다. 기죽지 말고 일어서 봐라.
그런데 그 다음해에 미국에서 열리는 똑같은 코스타 집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역시 강사님들은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달랐습니다.
미국 코스타에 참석한 청년들에겐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너희는 나라와 세계를 이끌 리더다!!!"
그들은 대부분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열악하지 않은 가정환경에 배울만큼 배웠고 여러모로 말그대로 리더가 되기에 필요한 조건들을 많이 갖춘 사람들인것이 사실입니다. 호주에 오는 청년들에 비해서요.
솔직히 돈 있고 백 있고 하면 영어 배우러 미국에 가지 왜 호주를 옵니까? 남들 알아주지도 않는 호주 영어 배우러요.
한국에서 이미 우리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기에 우린 부족하고 딸리는걸 느꼈고 한국에서 지금 상황으론 성공은 고사하고 먹고 사는것 자체가 불안할것 같기에 좀 달라질까해서 호주에 온 우립니다.
그리고 미국엔 배경으로나 자기실력으로나 정말 '리더'가 되기에 필요충분 조건을 갖춘 사람이 잔뜩 있습니다.
그 사이에 끼인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 살 수 있겠습니까? 정말 살아남을수 있겠습니까?
남들 하는 정도로, 비슷하게, 그나마도 호주에 온 다른 청년들 하는 양태대로 해서는 한국에 돌아가면 100% 떠나기전보다 더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호주에 온다는 것은, 왔다는 것은 일종의 큰 모험을 넘어서서 사고를 친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배수진을 쳤다는 거죠.
뭐라도 나아져서 돌아가지 않으면 떠나지 않는것이 더 낫습니다.
호주에서 일년 학원 다녀도 영어 안돼, 호주인들은 나랑 대화하고 놀아주려고 대기하는것 아냐, 여기서 토익을 공부해서 알아주는 것도 아냐, 차라리 그럴바에는 한국 토익학원 가서 토익 기법이나 익혀서 고득점이나 노려보는게 취직에 더 유리 합니다.
호주 오는 목적을 정확하며 명확하고 확실하게 잡고 와야 합니다. 안그러면 인생 망칩니다.
여긴 도피처도 아니고 지팡구도 아니고 명확한 현실입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남들 안가는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떠나면 얻을수 있는 세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첫번째, 큰 도시만 벗어나도 여행다니는 수많은 미국인들, 유럽인들 기타 다른 나라 사람들 부지기수로 만날수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부딪히지 않고선 다닐수가 없고 영어가 아니고선 대화가 안되기에 영어는 자연스럽게 늡니다. 진짜 영어회화 실력이 는다는 말입니다. 여기 살아보니 말은 정말 '버릇'이라는게 맞습니다. 패턴을 습득하니까 정확히 몰라도 대화가 쉽게 됩니다.
두번째, 사람을 얻을수 있습니다. 다니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내 맨 파워가 됩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그게 얼마나 큰 힘이고 자원인지. 나이가 먹어가면서 압니다. 3개국 친구만 사귀어도 내가 만약 나중에 그 나라들에 가게 되거나 살기를 원하게 될때 내가 비빌 언덕이 됩니다. 교두보가 됩니다.
세번째, 경험을 얻게 됩니다. 이건 뭐 그냥 관광다니면서 뭘 봐서 얻는 경험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삶의 경험을 얻게 됩니다.
호주를 일주하게 될때 얼마나 다양하고 별의별 경험을 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이 울고 얼마나 많이 웃고 얼마나 많이 죽을 고비도 넘겨보겠습니까? 그게 뭐에 도움이 되느냐구요? 중요하다고는 하는데 실제로 당장 필요한건 아니라구요?
한국에 영어학원이 없어서, 거기서 가르치는 수준이 낮아서 영어를 이제까지 못했습니까?
내가 약하기 때문에, 내가 의지가 없어서, 내가 왜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못한거죠.
경험은 바로 그런 나의 약점과 나약함을 채워줍니다.
영어요? 정말 나의 약한점, 의지력 부족, 인생의 목적과 의미 상실만 회복 된다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충분히 하고도 남을수 있습니다.
호주는 영어 배우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영어 못 배웁니다. 남들 하는대로 해서는요.
또 호주는 일하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가끔 방학시즌때 한국에서 관광비자로 들어와서 농장 들어가서는 불법으로 죽어라고 일해서 몇 만불 들고 한국 돌아가서 몇달 살고 하는 걸 정기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의 신념은 이렇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불법을 자행하지 않고는 날 살게 하지 못하고 요령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호주에서, 미국에서 영주권 받아서 먹고 살수 있게 하지 못하는 분이냐? 그만큼 약하고 별볼일 없는 분이냐? 그정도밖에 안되는 신이라면 차라리 안 믿고 만다!
목적이 잘못 되어 있으면 그렇게 밖에 못삽니다.
호주는 나를 찾고 발견하는 곳입니다. 진짜 내 인생의 의미, 다시 말해서 '나란 놈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냐?' 를 발견하는 곳입니다. 나의 진짜 가치를 발견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물에 비춰봐서 내 모습을 제대로 보고 날아가는 백조를 올려다봐야 '아, 내가 오리가 아니고 백조였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오리 사이에서 오리만 바라보고 살면 그 오리들 사이에서조차 부족하고 밀리는 나는 '열등한 오리'구나 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내가 '백조'인데도 말입니다. 저희 목사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 였습니다.
그런다음에야 답이 나옵니다. 그것을 갖고 오래도록 씨름을 해봐야 인생의 진짜 의미와 길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세상에 정말 '진리', '진짜'가 어떤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깊이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성경에 곤고할때는, 힘들때는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할수 있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안하면 나중에 정말 죽습니다.
호주에 오시려고 하는 분들, 진지하게 고민하고 오세요. 이미 와 계신분들도 한번쯤 현 위치를 돌아보시구요.
‘나의 찾는 걸음이 아름답다’ (나의 발걸음)
많은 분들의 지적처럼 비판적이고 비관적이고 무능력하고 어이없기까지 한 첫 번째 글의 주인공은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상당부분이 저의 이야기였습니다.
앞서도 밝혔지만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저의 살아온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상당히 오래, 짧지 않은 글을 이미 썼다가 순식간에 날려버린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쓰는것입니다)
저는 20대 시절,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14가지의 직업을 가져봤습니다.
커피숍 종업원, 술집 종업원, 호텔종사원, 여행사직원, 외국 현지 관광가이드, 무역대행회사(물류) 영업사원, 식당 종업원, 서류배달원, 다단계판매원, 요리사보조, 초등학교 보습학원 교사, 보험회사 영업사원, 운전기사, 청소부 등.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그 정도 안 해본 사람이 어디있냐’고 할 사람이 많을것입니다.
문제는 왜 그렇게 많고 다양한것을 해봐야 했었느냐입니다.
호주에 워홀비자로 처음 방문하기전에 그당시 그래도 꽤 이름있던 괜찮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인정도 받고 좋은 실적도 냈었고 아직 틀이 잘 잡혀있지 않던 부서에서 일하며 서류양식부터 일하는 시스템을 제가 다 만들어놨습니다. 그 부서에선 아직도 그때 제가 만들었던 양식과 업무처리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년쯤 다니고 나니까 조금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찮은 회사였지만 이대로는 그냥 평범한 월급쟁이 이상은 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주 워홀 비자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워홀 비자가 그렇게 보편화 되어있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에서 말렸고 일하던 부서에서 발령이나 다른 사람들이 다 가고 싶어했던 팀으로 옮길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졌지만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호주로 왔습니다.
회사 다니면서 젊은 나이에 싱글 남자가 술값 조금씩 아껴서 모아두었던 800만원으로 준비해서 떠난 호주여행이었습니다.
떠날땐 나름대로 포부도 많았습니다.
영어도 확실히 배워서 내 실력도 향상시키고 여행도 많이 해서 일년뒤엔 아주 다른 사람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서 돌아오리라.
초기 정착이 다행히 순조롭게 풀렸고 바로 영어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달반쯤 되니까 조금씩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사이에 친해진 한국인 친구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고 아침이 되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게 힘겨워지며 나중엔 출석률 80%를 맞추고자 머리를 굴리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대로 수료는 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글에 썼던것처럼 3개월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영어학교를 마치게 되니까 가져왔던 돈이 바닥이 났습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일을 구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굳이 투잡까지는 뛰지 않아도 방값내고 생활비 정도는 할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 하나를 더 구해서 했어야 돈을 조금이라도 모았고 그 돈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여행을 할수 있었을텐데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나태하고 안일해져만 가는 제 마음은 그냥 한가지 일만 하면서 혼자서 영어문법책이라도 좀 보면서 공부하고 주변 가까운데 여행도 하다가 또 기회가 되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게 만들었습니다.
6개월이 되니까 생각만큼 혼자 문법책이나마 들여다 보는 것은 고사하고 일 마치고 돌아와서 친구들과 잡담나누고 리스닝 연습을 핑계로 TV만 늦게까지 들여다보다가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뭔가 아닌것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학원이라도 다시 다니자! 워홀비자로 다른 학원을 또 다니는 것은 사실상 불법이었습니다만 그래야 그나마 영어라도 좀 더 배울것 같아서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님께 전화해서 더 공부를 해야겠기에 돈이 필요하다고 졸라서 12주를 또 끊어서 학원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안일해질대로 안일해진 저의 정신상태는 부모님 호주머니 뒤져서 시작한 영어학원을 2주만에 그만두게 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의미한 시간만 보내는 일상이 계속 되었습니다.
9개월쯤 되니까 한국에 돌아갈 걱정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를 익힌것도 아니고 경험을 충분히 쌓은것도 아니고 여행을 신나게 다닌것도 아니고 처음 떠나올때나 지금이나 뭐 다를게 없는 것 같은데 이대로 돌아갔다간 남들에게 비웃음 받는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끝장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미 9개월이 된 상태에서 별다른 표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10개월이 되자 ‘이렇게 돈만 날리고 시간만 보내느니 차라리 하루라도 일찍 들어가서 거기서 뭘 찾아보던가 다시 시작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워홀비자 12개월도 다 채우지 못한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겨우 10개월전이었는데 그사이 한국 상황이 많이 변해있었고 IMF가 터지기 직전으로 경제상황이 상당히 안좋아진 상태였습니다.
10개월전엔 분명히 내가 비집고 들어가서 먹고 살았던 ‘내 자리’가 있었는데 10개월후에 와보니까 내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한국사회는 그 사이 100m라는 거리를 진행했는데 10개월전 100m 뒤의 내 자리에서 빠져나와 호주에 나와 지내면서 나도 똑같이 100m를 진행한것이 아니라 20m, 30m만 진행한것이다 보니 다시 돌아갔을때 20m, 30m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앉아 있었고 저는 그 자리에 끼어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고 놀기시작한지 3개월이 되었고 그 사이 답답해하시는 부모님과 사이만 나빠지면서 점점 압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호주에 있을때 다녔던 교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 났습니다.
“아직 호주는 (브리스번은) 그렇게까지 한국인들이 많지 않은 곳이니까 너만 마음을 먹는다면 여기와서 살수 있는 기회를 잡기에 좋은 곳이다. 여기서 공부해라. 미래를 준비해봐라. 그러면 네 인생이 달라질꺼다.”
‘그래, 호주로 돌아가자. 내가 있을곳은 호주였나보다.’
호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학생비자로 왔습니다.
그래, 해보자와 실제로 와서 하는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학생비자를 받아서 해보자, 살아보자 하는것과 진짜 학생으로 공부하며 살아가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정말로 공부를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리를 못잡아 쫓기는 심정으로 학생비자를 받아 온 것이기에 공부가 들어올 리가 없었고 이전에 10개월동안 있으며 회화실력이나마 어느정도 다져놓은것도 아니었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힘들었을 과정도 아닌데 너무나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졌고 결국 얼마되지 않아 학교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한국도 갈수 없고, 호주도 더 있을수 없고,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고민하다가 미국에 계신 친척집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미국에 가보자. 큰 물은 다를거야.
친척이 저를 먹여살려야 하는 의무를 띄고 미국에 이민 간것은 아니었습니다.
친척집에 갔지만 더 먼 친척, 저희 어머니도 “그런 친척동생이 있긴 있었던것 같다”라고 하실 정도의 먼 친척집이 막 미국에 이민와서 시작하신 중국요리 식당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살면서 해본것은 많기에 평생 건축일만 하시다가 자식들 때문에 미국 오셔서 식당을 시작한 그 먼 친척분의 일을 좀 도우라는 미명하에 보내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루에 14시간씩 일했습니다. 주방이며 홀이며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14시간중 밥먹는 시간 포함해서 딱 30분 쉴수 있었습니다.
13시간 30분은 앉지않고, 쉬지않고 일해야 했습니다.
닭띠 분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그때 그 시절 이후로 제가 닭띠를 별로 안좋아합니다.
그 먼 친척분이 닭띠였는데 (물론 띠가 문제는 아니겠지만) 본인도 쉬지 않고 일했지만 남도 쉬는 꼴을 못봤습니다.
본인은 손님없을때 창고에 들어가 누워서 잠을 잘 망정 제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기가 막히게 아시고 불러서 일하라고 다그쳤습니다.
3분정도 앉아있으면 바로 불러서 쓰지 않는 그릇 때라도 벗기라고 일을 시켰습니다.
집에서 잠은 그 집에 7살짜리 아들과 4살짜리 딸이 쓰는 작은 어린이 이층침대의 일층을 빌려서 잤는데 발을 다 뻗을수가 없었고 앉으면 윗 침대에 머리가 닿는 곳에서 잤습니다.
매일밤 혼자 창문으로 달을 보며 일기를 쓰고, 윗 침대의 그 집 아들이 깰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니 손전등으로 갖고 갔던 손바닥만한 성경책 들여다보며 위안을 삼아 살았었습니다.
가게에서 일이 마치는 늦은 밤이 되면 부인과 자녀들 네명이 가게로 와서 그날의 수입을 계산하면서 아이들은 음료수 빼먹으로 뛰어놀고 부인은 함께 돈 세며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그동안 저는 혼자서 주방과 홀을 청소했습니다.
중국식 식당이기에 닭요리가 많았고 닭을 직접 손질해서 쓰기에 닭 찌꺼기며 갖은 음식 쓰레기들이 큰 파란색 원통형 쓰레기통에 두통 가득히 매일밤 나왔습니다.
건물뒤에 큰 쓰레기 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청소의 마지막 단계로 파란 큰 음식물 쓰레기통을 그 쓰레기차로 가져다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두웠고 또 미국사람 쓰레기차여서인지 모르지만 쓰레기 차 높이도 높아서 그 무거운 음식물 쓰레기통을 머리위까지 혼자 들어올려서 버려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유난히 바뻤던 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서 쓰레기를 버리러 갔습니다.
특히 더 무거웠던 그 음식물 쓰레기를 혼자서 죽을힘을 다해 머리위로 들어올렸을때 닭찌꺼기 국물이 새며 그 오물에 손이 미끄러지면서 쓰레기통 한통을 머리부터 거꾸로 완전히 뒤집어 썼습니다.
닭껍질, 뼈다귀, 피, 육수, 음식쓰레기, 기타 별별 더러운 오물로 범벅이 된 상태로 쓰레기 차 옆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몇일후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전화를 걸었는데 (인터넷은 그 집에 없었고 전화는 눈치보여서 쓰기 어려웠고 부모님도 이번에 가면 뼈를 묻을 각오를 하라고 하셨기에 감히 자주 걸수 없었습니다) 이틀내내 아무도 받질 않는것이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걱정이 되어서 아버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음성이 나오기 직전에 아버님이 받으셨습니다.
“아버지, 저예요. 왜 그렇게 전화를 안받으셨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버님이 한참을 말없이 전화를 들고 계시더니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사실은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지금 발인을 막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이래뵈도 집안에서 장손입니다. 장손이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지켜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를 끔찍이도 아껴주셨던 할아버지셨는데.
왜 알려주지 않으셨느냐니까 아버지 대답이 더 기가 막혔습니다.
“그 와중에도 전가족 회의를 했다. 너를 부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결론은 부르지 말자였다. 이유는 이번에 또 이렇게 들어와 버리면 네 인생 말 그대로 ‘조질것’ 같다는게 이유였다. 그래서 안 불렀다. 그렇게 알아라.”
참 비참했습니다. 정말 사는게 싫었습니다.
그때쯤 친척분께서 제안을 하나 해 오셨습니다.
학생비자는 비자인데 학교는 가지 않아도 되는 비자가 있다. 그 비자 받고 일만 열심히 몇 년 하면 여기서 영주권 받고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일 자체에 지쳐 있었고 할아버지 돌아가신데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귀에 들어올리 없었고 한국에 가서 포장마차라도 해서 정말 제대로 다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 처음 호주 갔다가 한국 갔을때는 식구들이 다 공항에 꽃다발 들고 나왔습니다.
두 번째 호주에서 실패하고 한국 들어 갔을때는 어머니 혼자 꽃한송이 들고 나오셨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갔을때는 어머니 혼자서도 마지 못해 빈 손으로 나오신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물론 별반 달라진것 없이 저를 위해 누가 일자리 마련해서 기다리고 있는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이어른 애들 틈에서 하는게 부끄럽긴 했지만 아뭏튼 어느 회사 서류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고 몇 달 못되어 누군가의 소개로 다단계 업체를 알게 되어 다단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그래도 공짜로 일한것은 아니어서 조금 모아갖고 들어온 돈, 다단계로 날렸습니다.
그리곤 다시 또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이름도 없는 작은 초등학생 보습학원의 교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호주도 갔다왔고 미국도 좀 있었으면 영어선생님을 했어야 체면이 서는데 한문선생님 했습니다.
책에 나온 획 쓰는 순서와 다르다고 아이들에게 얼마나 망신을 당했었는지...
이름없는 작은 학원이어서 곧 망했고 거기서 나와야 했던 저는 이번엔 보험회사를 두드렸습니다.
신입사원 교육을 받던 한달동안 그래도 열심히 해서 최우수교육생 상까지 받고 시작했습니다.
유난히 저를 싫어하던 보험회사 윗 사람이 ‘최우수교육생 치고 실제로 제대로 하는 놈 못봤다’는 악담이 효력을 발휘했는데 저의 실적은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다단계와 달리 열심히만 했으면 정당한 보수를 상당히 받을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개척 나가기 두렵고, 소개 해달라고 부탁하기 어색하고 상품 권할 용기 없다는 핑계로 열심히 하지 않다가 끝내는 빚만 지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채로 그곳에서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총체적으로 엉망이었습니다. 총체적 부실, 총체적 파산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삶은 ‘차선’이 있었고 그 차선들로 늘 옮겨다니던 삶이었습니다.
이게 아니것 같으면 저것으로, 저게 아닌것 같으면 또 이것으로.
그런데 이번엔 그 ‘차선’이 없었습니다. 도피처가 더 이상 없더라는 말입니다.
어디 작은 돌부리라도 있어야 발을 옮길텐데 차올라오는 물을 피할 차선의 징검다리가 없었습니다.
갈데까지 간것이었고 그때쯤 되니까 자살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실행을 얼마 앞둔 어느날, 예전에 호주에서 다녔던 그 교회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하시는데 한번 보자고 하셨습니다.
만나더니 앞뒤없이 대뜸 “너 사는거 어렵지?” 그러셨습니다.
그래도 은사인 분에게 현실을 그대로 말씀드릴수는 없어서 잘산다고 했는데도 부득불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랬구요.
그러더니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더 기회를 줄게. 호주로 와라. 와서 나 도와서 함께 일해봐라. 네게 마지막 기회가 될수 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연락해.”
제겐 기적이었고 구세주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호주로 다시 오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글에서 제가 청년들을 섬기고 있다는 말은 제가 무슨 전도사님이나, 목사님같은 일을 한다는게 아니었고 교회 청소로, 봉고차 운전사로 일하며 청년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에게 저의 지금까지 써내려온것과 같은 삶을 이야기 해주며 나는 이렇게 시간을 잘못 사용해서 인생을 낭비했으니 여러분은 그러지 마십사 하는 말을 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의지가 약하고 인생의 목적도 없고 게으르고 나태한 성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호주에서의 첫 10개월, 워홀 비자로 와서 정말 의미있게 시간을 사용했어야 할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때의 여파가 그 이후 5년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고 지금 이순간까지도 영향을 미치며 사랑하는 저의 식구, 가족들에게까지 고통을 당하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을 떠나 외국에 나온다는 것은 언뜻 별것 아닌것 같은, 한순간의 경험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어떤면에서 그것은 모험을 넘어서서 도박을 벌인것이나 마찬가지일수 있습니다.
무언가 나아져서 돌아가지 않고서는 떠나기 전보다 더 못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이유는 내가 그게 무엇이든 부족한것을 느꼈고 한국에서 잘 안풀렸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호주로 떠나오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고서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여기에 남아서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하게 붕 떠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어공부 절대하지 말라는 말도 정말 영어공부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호주 영어가 형편없다는 말도 아니었고 미국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었고, 호주에 오는 정말 이유는 왜 내가 한국에서 어려웠고 힘들었고 더 열심히 잘 살아보지 못했는가 깊이 돌아보면서 나의 약점, 나를 발목 잡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치료하고 돌아가서 더 자신감을 얻어 열심히 살아갈수 있게 하는데에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사회는 너무 바빠서 나를 돌아볼, 깊이 성찰해 볼 시간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시간이 낭비갖고 그동안 달려 나가는것 같은 친구들을 돌아보면서 불안해 하기 때문에 그럴수가 없지만 일단 호주에 나오면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니고 잔소리 하는 것도 아니고 해야만 하는것이 있는것도 아니기에 좀 더 자유롭게 자기자신에게 집중할수 있습니다.
그 소중한 기회를, 어쩌면 평생 한번밖에 없을수 있는, 잘 활용해서 나를 돌아보고 나의 부족한 점-실력이나 학력이 아닌-을, 약점을 명확히 바라보며 두 번째 글에서 설명했듯이 미쳐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다양한 길들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치유하고 채우고 다지고 강하게 만든후 혹시라도 그런 와중에 내가 정말 가야할 길, 인생의 방향, 목적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그곳으로 발을 옮겨 남은 삶을 의미있게 전력질주 할수 있는 그런 모든 것의 가능성으로 호주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에 영어학원이 없어서가 아니었고 여기서 쓰고 가는 돈만큼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호주가 별천지여서도 아닙니다.
내 근본적 문제를 돌아볼 시간도, 고칠 기회도 없었고 남들 뛰니까 나도 그냥 어리버리하게 뛰기만 뛰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며 살아왔던 삶이었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나란 사람은 정말 어떤 사람인가’를 발견하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내가 태어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나의 가장 약한 점을 자신감과 경험등으로 보완’ 시킨다면 그 이후로 그 사람의 삶은 크게 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론입니다. 검증된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하지 못했고 아직 인생을 다 살아본게 아니기 때문에 효력이 있는건지, 정말 그렇게 되긴 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답이다. 이게 진짜다. 이게 길이다. 이대로만 하면 다 된다’는 식으로 ‘정답’을 제시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지만 ‘이건 길이 아니더라. 이렇게 하면 안된다. 이것만큼은 피해야 한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표시해 주는것도 또 한가지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누군가를 위해서 말입니다.
호주에 'Wrong way. Go back'이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빨간색 큰 간판으로 보기도 흉물스럽고 ‘그걸 누가 몰라? 누가 그 길로 가야 바보야?’ 하는 표지판이지만 그게 없으면 큰 사고를 불러 일으킬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빨간 표지판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저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더 이상 내가 잘되어 보자고, 꼬인 인생을 풀어서 ‘성공’해보자고 생각하는 대신, 빨간 표지판이 되어서 ‘이 길은 아니다’라고 보여주어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언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말입니다.
제가 이끌어 줄수는 없습니다. 결국 저는 리더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가본 길은 옳은 길들은 아니었기에 그 길로 이끌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딘가 한자리에 굳건히 서서 ‘Wrong way. Go back’하고 말해줄 수는 있겠지요.
이 글로 그런 마음으로, 호주로 오기전에 한번쯤 마음을 다시 다지고 목적을 확실하게 하고 오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기로 한것입니다.
단 한명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전 만족합니다.
첫번째 글에서 이런저런 현실적인 어려움과 문제들에 대해 많이 썼지만 쓰려고 들면 더많은 문제들이 있지요.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를 잘 극복하면서 좋은 결과를 얻고 돌아갈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청년들을 상담하면서 꼭 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경주마 이야기 입니다.
경주마를 생각해 보세요. 경주마는 항상 눈가리개를 하고 있지요.
앞만 보고 정신없이 한 곳만 뛰게 하기 위해서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한국에서 우린 눈가리개를 하고 뛰는 경주마와 똑같습니다.
누가 눈가리개를 채워놨고 어디로 뛰는건지 또 누가 내 위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정신없이 뛰도록 재촉하는지도 모르는데 앞 말의 꽁지만 쳐다보면서 죽어라고 뛰고 또 뜁니다.
그 길이 내가 가고 싶은 길일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고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면서 남이 뛰니까 나도 뛰고 뒤에서 쫓아오니까 또 뛰고, 뛰고 또 뛰고...
호주로 온다는 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집니다.), 외국에 나가 본다는 것은 바로 이 눈가리개를 잠시 떼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정신없이 어딘가로 뛰기만 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눈가리개를 떼어내는 것입니다.
눈가리개를 떼어내면 어떻게 될까요?
"어? 뭐야? 저 옆에 있는 길은? 길이 내가 뛰던 길만 있는게 아니었잖아? 어? 왼쪽에도 길이 있네? 하나도 아니고 엄청나게 많잖아? 저 많은 길들에서 뛰고 있는 쟤네들은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호주 오는 대부분의 청년들이 호주에 와서 눈가리개를 떼어냅니다. 아니, 떼어지죠.
그런데 희안한것은 눈가리개를 떼어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앞만 바라본다는 겁니다.
눈을 굴려서 옆을 보면 마치 죽는것처럼 눈가리개도 없는데 계속해서 앞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어쩌면 더 열심히) 겁먹은 송아지 눈마냥 그렇게 있다가 12개월뒤에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자기 손으로 눈가리개를 철썩하고 붙이고 다시 또 정신없이 어딘가로 뜁니다.
밖에 나왔으면, 눈가리개를 기껏 떼어냈으면 옆을 봐야죠.
오른쪽도 좀 보고, 왼쪽도 좀 보고...그래야 그동안 가려져서 안보였던 무언가를 찾을수 있죠.
눈 돌리는 자체가 두려운 겁니다. 뭔가 새로움을 발견한다는게 무서운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경직되어 있고 위축되어 있고 정형화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옆에 있는 수많은 길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뛰어왔던 - 왜 뛰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던 - 그 길과는 전혀 다른 그런 길들입니다.
그중에 어떤 길이 내게 정말 잘 맞고 내가 뛰고 싶었던, 내가 가장 잘 뛸수 있는 길인지 뛰어봐야, 아니, 쳐다라도 봐야 찾든지 말든지 할것 아니겠습니까?
그 길은 같이 뛰는 다른 말들이 너무 많아서 밀리던 그런 길도 아니고 험난하기만 했던 자갈길이 아닐수도 있고 더 넓을 수도 있고 함께 뛰고 싶던 다른 말들이 이미 가고 있어서 내 손을 붙잡아 줄수도 있는 그런 길일수도 있습니다.
쳐다봐야죠, 그리고 그 길들을 하나씩 달려봐야죠, 그래서 어느 길이 내게 정말 맞는지, 어느 길이 정말 내가 찾고 싶었던, 달리고 싶었던 길인지 찾아봐야죠, 분명히 있을텐데...바로 '그 길'이...내가 목마르게 찾던, 뭔지 잘은 몰랐지만 내 마음속에서 갈망하고 또 갈망하던...나의 가치를 제대로 표현하고 내 삶의 의미를 찾게 해줄 바로 그 길이요......
한국에서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과 의식구조를 고스란히 그대로 간직한채 '여기도 뭐 별 볼일없네' 하고 불평하고 자신을 또 원망하고 비하하며 12개월, 시간만 보내고 다시 한국에 가서 눈가리개를 또 채우고 답답해하면서도 어쩔수없이 또 뛰어야하는 그 길로 들어서는게 대부분의, 정말 대부분의 이곳에 오는 청년들의 실상입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 13년동안 청년상대로 목회하시면서 내린 결론이 이겁니다.
"여기 오는 청년들은 자신이 부족한것도 알고 더 배워야하고 더 경험해야하고 인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도 안다. 아주 잘안다. 그리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것은 의지력이 약하다.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만다."
다른 길을 찾는 방법이요? 바로 내 길을 찾는 방법이요?
우선, 앞서 말했듯이 두려움을 이기고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냥 눈동자만 살짝 굴려보면 됩니다. 오른쪽 한번, 그리고 왼쪽 한번, 그러면 됩니다.
그다음 발견했다면 과감히 지금의 길을 벗어나서 우선 바로 옆 길로 들어서 보는 겁니다. 한번쯤 뛰어보고 다시 또 옆길로도 한번, 그러다보면 계속 다음길, 다음길이 아니라 바라보는 요령이 생겨서 세번째 다음길, 왼쪽으로 일곱번째 있는길 등등 점점 내 마음에 보이는 길을 골라서 뛰어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순간 발견하는 거죠. "빙고!"
지난번 글에 썼듯이 호주에 처음와서 기본적으로 처음에 영어학교 다니고 적응하고 돈 떨어질때쯤 되는 3개월까지는 아직 다른 길로 들어서 본게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3개월, 즉 영어학교가 마치기전에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해서 영어학교가 마치자 마자 즉시 떠나는 겁니다.
돈 다 떨어지기 전에, 당장 생활비가 문제되기 전에 버스표 사놓고 학교 땡하면 바로 떠나는 겁니다.
어디라도 좋습니다. 일단 다른 큰 도시가 되겠죠. 떠나는 자체가 중요합니다.
3개월이 넘으면 그 지역 생활에 이미 적응이 되고 안주가 되고 돈 문제등도 겹쳐서 떠나기가 아주 어려워집니다. 두려워지는거죠.
아직 뭘 모를때 저질러야 합니다.
일자리도 떠나서 도착한 다른 지역에서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안하면 정말이지 호주에서 두지역도 못 다녀보고 한국가게 됩니다.
호주에 '살려고' 온거 아니잖습니까?
여기 오는 청년들중 10명중 약 2-3명만이 비자를 제대로 사용하고 또 떠나온 의미를 제대로 찾고 돌아갑니다.
다들 그러죠. 일자리가 없다고. 무작정 떠났다가 일자리 못 구하면 어떻하냐고, 돈 떨어지면 끝장인데 뭘 믿고 떠나느냐고.
일자리가 도시만큼 없겠습니까? 모두 다 몰려있어서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하는 도시만큼 없겠느냐구요?
여기 오래 있다보니까 청년들이 처음에 와서 돌아가기까지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볼수 있게 됩니다.
위의 2-3명에 해당하는 청년들에게 물어봅니다.
떠나보니까 정말 일자리가 없더냐? 죽을것 같더냐? 역시 큰 도시가 안정적인 해결책이더냐?
대답은? "당근으로 아니죠!" 그리고 "안 떠났으면 큰일 날뻔 했어요. 빈손으로 돌아갈뻔 했다는 말이죠. 왜 남들이 하는것과 똑같은 것만 고집해야 하죠? 그러니까 일자리가 없고 기회가 없죠. 떠나보면 내가 보지 못하던것을 볼수 있고 그러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마음상태가 달라져서 남들이 생각지 못하던 것들에서 나의 기회를 찾을수 있어요. 충분히 먹고 살구요, 여행도 하구요 다 살게 되어 있어요. 그게 다 나를 만드는 거구요!"
'다 살게 되어 있어요' - 이게 답입니다. 제가 만들어낸 말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길이 보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른게 아니라 주변에 남들 하듯이 똑같이 외국에 나와서 까지 편하게 안주하려고 하지 말고 남들 대부분 안하려는걸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그냥 버스표 사서 다른 곳으로 (유명한 큰 도시가 아니면 더 좋겠지만 일단 큰 도시라도) 떠나는 겁니다. 초기 3개월 이내에요. 그게 다 입니다.
그 다음은 거기서 생각하면 되고 일해서 돈 벌면 또 떠나고 또 떠나고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달라져 가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심심치않게 이곳에서 호주를 완전 일주하고 돌아가는 청년들을 봅니다. 반바퀴도 아니고 일주요.
최근에 한 여자청년이 (남자도 아닌 여자청년이) 호주를 완전히 일주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시작은 브리스번이었고 갖고 온 돈이 부족해서 영어학교도 못 다녔습니다.
처음 두 달은 떠나길 주저하더군요. 역시 불안하고 또 영어도 안되고 한다는 이유로요.
두 달이 되니까 그나마 조금 갖고 온 돈도 떨어지고 당장 일자리를 못 구하면 먹고 사는것 자체가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죠. 잘 안구해졌구요. 이런저런 몇가지 일을 어떻게 구해서 해봤지만 '내가 도대체 여기서 이 짓 하려고 왔나' 하는 마음만 자꾸 들고...제가 권했습니다. 그냥 떠나라. 무서워도 떠나봐라.
요즘 유행인 농장에 들어갔습니다. 카불처 라는 곳에 있는 딸기 농장이었죠.
언제 농장일 해봤겠습니까? 거기서 '딸신' 되었습니다. (오시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압니다. 딸기 최고 잘 따면 딸기의 신, 딸신이고 파 잘따면 파신이고...-.-;; 농장일 해본 사람은 여기서 농산물 못 사먹습니다. 파 사려고 하면 '이 파는 어떤 녀석이 또 별 쳐다보고 울면서 딴 파일까' 싶어서요.)
그렇게 모든 돈으로 남들 I-POD사고 술로 날릴때 꽁꽁 모아서 여행 떠났습니다.
여행 한 이십일 하니까 돈 떨어졌죠. 주변에 있는 아무 농장에나 닥치는대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해본 경험이 있다보니 업종이 달라도 바로 손에 익을수 있었습니다. 어딜가나 바로 '신'이 되었고 돈 모을수 있었습니다.
또 떠나서 여행하고 또 어딘가에서 일하고, 일도 꼭 농장이 아니라 어디 도시에서 축제를 하면 거기 자원해서 칩스 튀겨서 파는 일도 하고, 청소일도 하고 (물론 진짜 호주인들과 함께요)...그렇게 해서 9개월만에 호주를 일주하고 뉴질랜드까지 다녀왔습니다.
새까매져서 돌아온 그 청년에게 물었죠. "죽을것 같더냐?" "무슨 말씀. 나 이제 뭐든지 다 할수 있을것 같아요. 한국에 가서도 남들과 다르게 살꺼예요. 내가 왜 토익 만점 받아서 대기업 들어가겠다고 머리 터지게 싸우며 살아요?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갈 길을 찾았어요. 내 인생은 달라질꺼예요."
한국에서 정말 평범했던, 부족하기까지 했기에 여기 와야만 했던 그런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해낸 일입니다.
한국에서와 똑같이, 여기 대부분의 다른 청년들과 똑같이 영어학교나 코스 바꿔가며 다니고 너무 길게 끊어온것 후회하며 그것 불법으로 남에게 팔러 다니고 밤이면 한국인들끼리 모여서 파티 열어서 술이나 마시고 (요즘 정말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왔을때만해도 감히 식당에서 소주 못 사먹었습니다. 돈이 없어서요. 근데 요즘은 하룻밤에 $200-300 술값으로 지불하는 청년들 부지기수로 봅니다. 이래도 돈이 없고 불안해서 못 떠난다고 말할수 있습니까?) 머리 터지게 똑같은 일, 똑같이 경쟁해가며 $8 받아서 먹고 사는걸로 고생하다가 나중에 겨우 멜번이나 한번, 뉴질랜드나 보름 갖다오고 돌아가겠습니까?
매년 12월이면 시드니에서 KOSTA라는 기독교 청년 집회가 열립니다.
교파에 상관없이 전세계적으로 기독교인 청년들을 모아놓고 기독교인으로 한국에서 정치, 경제, 종교, 사회적으로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와서 청년들에게 도전을 주는 집회입니다.
강사들이 자비로 와서 하는 것이기에 나라별로 코스타가 다 있어도 강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전에 제가 호주 코스타에 갔을때 일입니다. 강사님들이 한결같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도 할수 있다!" 였습니다. 너도 할 수 있다. 힘내봐라. 너도 잘 될수 있다. 기죽지 말고 일어서 봐라.
그런데 그 다음해에 미국에서 열리는 똑같은 코스타 집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역시 강사님들은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달랐습니다.
미국 코스타에 참석한 청년들에겐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너희는 나라와 세계를 이끌 리더다!!!"
그들은 대부분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열악하지 않은 가정환경에 배울만큼 배웠고 여러모로 말그대로 리더가 되기에 필요한 조건들을 많이 갖춘 사람들인것이 사실입니다. 호주에 오는 청년들에 비해서요.
솔직히 돈 있고 백 있고 하면 영어 배우러 미국에 가지 왜 호주를 옵니까? 남들 알아주지도 않는 호주 영어 배우러요.
한국에서 이미 우리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기에 우린 부족하고 딸리는걸 느꼈고 한국에서 지금 상황으론 성공은 고사하고 먹고 사는것 자체가 불안할것 같기에 좀 달라질까해서 호주에 온 우립니다.
그리고 미국엔 배경으로나 자기실력으로나 정말 '리더'가 되기에 필요충분 조건을 갖춘 사람이 잔뜩 있습니다.
그 사이에 끼인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 살 수 있겠습니까? 정말 살아남을수 있겠습니까?
남들 하는 정도로, 비슷하게, 그나마도 호주에 온 다른 청년들 하는 양태대로 해서는 한국에 돌아가면 100% 떠나기전보다 더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호주에 온다는 것은, 왔다는 것은 일종의 큰 모험을 넘어서서 사고를 친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배수진을 쳤다는 거죠.
뭐라도 나아져서 돌아가지 않으면 떠나지 않는것이 더 낫습니다.
호주에서 일년 학원 다녀도 영어 안돼, 호주인들은 나랑 대화하고 놀아주려고 대기하는것 아냐, 여기서 토익을 공부해서 알아주는 것도 아냐, 차라리 그럴바에는 한국 토익학원 가서 토익 기법이나 익혀서 고득점이나 노려보는게 취직에 더 유리 합니다.
호주 오는 목적을 정확하며 명확하고 확실하게 잡고 와야 합니다. 안그러면 인생 망칩니다.
여긴 도피처도 아니고 지팡구도 아니고 명확한 현실입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남들 안가는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떠나면 얻을수 있는 세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첫번째, 큰 도시만 벗어나도 여행다니는 수많은 미국인들, 유럽인들 기타 다른 나라 사람들 부지기수로 만날수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부딪히지 않고선 다닐수가 없고 영어가 아니고선 대화가 안되기에 영어는 자연스럽게 늡니다. 진짜 영어회화 실력이 는다는 말입니다. 여기 살아보니 말은 정말 '버릇'이라는게 맞습니다. 패턴을 습득하니까 정확히 몰라도 대화가 쉽게 됩니다.
두번째, 사람을 얻을수 있습니다. 다니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내 맨 파워가 됩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그게 얼마나 큰 힘이고 자원인지. 나이가 먹어가면서 압니다. 3개국 친구만 사귀어도 내가 만약 나중에 그 나라들에 가게 되거나 살기를 원하게 될때 내가 비빌 언덕이 됩니다. 교두보가 됩니다.
세번째, 경험을 얻게 됩니다. 이건 뭐 그냥 관광다니면서 뭘 봐서 얻는 경험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삶의 경험을 얻게 됩니다.
호주를 일주하게 될때 얼마나 다양하고 별의별 경험을 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이 울고 얼마나 많이 웃고 얼마나 많이 죽을 고비도 넘겨보겠습니까? 그게 뭐에 도움이 되느냐구요? 중요하다고는 하는데 실제로 당장 필요한건 아니라구요?
한국에 영어학원이 없어서, 거기서 가르치는 수준이 낮아서 영어를 이제까지 못했습니까?
내가 약하기 때문에, 내가 의지가 없어서, 내가 왜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못한거죠.
경험은 바로 그런 나의 약점과 나약함을 채워줍니다.
영어요? 정말 나의 약한점, 의지력 부족, 인생의 목적과 의미 상실만 회복 된다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충분히 하고도 남을수 있습니다.
호주는 영어 배우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영어 못 배웁니다. 남들 하는대로 해서는요.
또 호주는 일하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가끔 방학시즌때 한국에서 관광비자로 들어와서 농장 들어가서는 불법으로 죽어라고 일해서 몇 만불 들고 한국 돌아가서 몇달 살고 하는 걸 정기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의 신념은 이렇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불법을 자행하지 않고는 날 살게 하지 못하고 요령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호주에서, 미국에서 영주권 받아서 먹고 살수 있게 하지 못하는 분이냐? 그만큼 약하고 별볼일 없는 분이냐? 그정도밖에 안되는 신이라면 차라리 안 믿고 만다!
목적이 잘못 되어 있으면 그렇게 밖에 못삽니다.
호주는 나를 찾고 발견하는 곳입니다. 진짜 내 인생의 의미, 다시 말해서 '나란 놈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냐?' 를 발견하는 곳입니다. 나의 진짜 가치를 발견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물에 비춰봐서 내 모습을 제대로 보고 날아가는 백조를 올려다봐야 '아, 내가 오리가 아니고 백조였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오리 사이에서 오리만 바라보고 살면 그 오리들 사이에서조차 부족하고 밀리는 나는 '열등한 오리'구나 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내가 '백조'인데도 말입니다. 저희 목사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 였습니다.
그런다음에야 답이 나옵니다. 그것을 갖고 오래도록 씨름을 해봐야 인생의 진짜 의미와 길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세상에 정말 '진리', '진짜'가 어떤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깊이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성경에 곤고할때는, 힘들때는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할수 있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안하면 나중에 정말 죽습니다.
호주에 오시려고 하는 분들, 진지하게 고민하고 오세요. 이미 와 계신분들도 한번쯤 현 위치를 돌아보시구요.
‘나의 찾는 걸음이 아름답다’ (나의 발걸음)
많은 분들의 지적처럼 비판적이고 비관적이고 무능력하고 어이없기까지 한 첫 번째 글의 주인공은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상당부분이 저의 이야기였습니다.
앞서도 밝혔지만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저의 살아온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상당히 오래, 짧지 않은 글을 이미 썼다가 순식간에 날려버린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쓰는것입니다)
저는 20대 시절,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14가지의 직업을 가져봤습니다.
커피숍 종업원, 술집 종업원, 호텔종사원, 여행사직원, 외국 현지 관광가이드, 무역대행회사(물류) 영업사원, 식당 종업원, 서류배달원, 다단계판매원, 요리사보조, 초등학교 보습학원 교사, 보험회사 영업사원, 운전기사, 청소부 등.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그 정도 안 해본 사람이 어디있냐’고 할 사람이 많을것입니다.
문제는 왜 그렇게 많고 다양한것을 해봐야 했었느냐입니다.
호주에 워홀비자로 처음 방문하기전에 그당시 그래도 꽤 이름있던 괜찮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인정도 받고 좋은 실적도 냈었고 아직 틀이 잘 잡혀있지 않던 부서에서 일하며 서류양식부터 일하는 시스템을 제가 다 만들어놨습니다. 그 부서에선 아직도 그때 제가 만들었던 양식과 업무처리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년쯤 다니고 나니까 조금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찮은 회사였지만 이대로는 그냥 평범한 월급쟁이 이상은 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주 워홀 비자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워홀 비자가 그렇게 보편화 되어있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에서 말렸고 일하던 부서에서 발령이나 다른 사람들이 다 가고 싶어했던 팀으로 옮길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졌지만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호주로 왔습니다.
회사 다니면서 젊은 나이에 싱글 남자가 술값 조금씩 아껴서 모아두었던 800만원으로 준비해서 떠난 호주여행이었습니다.
떠날땐 나름대로 포부도 많았습니다.
영어도 확실히 배워서 내 실력도 향상시키고 여행도 많이 해서 일년뒤엔 아주 다른 사람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서 돌아오리라.
초기 정착이 다행히 순조롭게 풀렸고 바로 영어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달반쯤 되니까 조금씩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사이에 친해진 한국인 친구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고 아침이 되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게 힘겨워지며 나중엔 출석률 80%를 맞추고자 머리를 굴리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대로 수료는 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글에 썼던것처럼 3개월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영어학교를 마치게 되니까 가져왔던 돈이 바닥이 났습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일을 구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굳이 투잡까지는 뛰지 않아도 방값내고 생활비 정도는 할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 하나를 더 구해서 했어야 돈을 조금이라도 모았고 그 돈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여행을 할수 있었을텐데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나태하고 안일해져만 가는 제 마음은 그냥 한가지 일만 하면서 혼자서 영어문법책이라도 좀 보면서 공부하고 주변 가까운데 여행도 하다가 또 기회가 되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게 만들었습니다.
6개월이 되니까 생각만큼 혼자 문법책이나마 들여다 보는 것은 고사하고 일 마치고 돌아와서 친구들과 잡담나누고 리스닝 연습을 핑계로 TV만 늦게까지 들여다보다가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뭔가 아닌것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학원이라도 다시 다니자! 워홀비자로 다른 학원을 또 다니는 것은 사실상 불법이었습니다만 그래야 그나마 영어라도 좀 더 배울것 같아서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님께 전화해서 더 공부를 해야겠기에 돈이 필요하다고 졸라서 12주를 또 끊어서 학원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안일해질대로 안일해진 저의 정신상태는 부모님 호주머니 뒤져서 시작한 영어학원을 2주만에 그만두게 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의미한 시간만 보내는 일상이 계속 되었습니다.
9개월쯤 되니까 한국에 돌아갈 걱정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를 익힌것도 아니고 경험을 충분히 쌓은것도 아니고 여행을 신나게 다닌것도 아니고 처음 떠나올때나 지금이나 뭐 다를게 없는 것 같은데 이대로 돌아갔다간 남들에게 비웃음 받는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끝장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미 9개월이 된 상태에서 별다른 표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10개월이 되자 ‘이렇게 돈만 날리고 시간만 보내느니 차라리 하루라도 일찍 들어가서 거기서 뭘 찾아보던가 다시 시작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워홀비자 12개월도 다 채우지 못한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겨우 10개월전이었는데 그사이 한국 상황이 많이 변해있었고 IMF가 터지기 직전으로 경제상황이 상당히 안좋아진 상태였습니다.
10개월전엔 분명히 내가 비집고 들어가서 먹고 살았던 ‘내 자리’가 있었는데 10개월후에 와보니까 내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한국사회는 그 사이 100m라는 거리를 진행했는데 10개월전 100m 뒤의 내 자리에서 빠져나와 호주에 나와 지내면서 나도 똑같이 100m를 진행한것이 아니라 20m, 30m만 진행한것이다 보니 다시 돌아갔을때 20m, 30m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앉아 있었고 저는 그 자리에 끼어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고 놀기시작한지 3개월이 되었고 그 사이 답답해하시는 부모님과 사이만 나빠지면서 점점 압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호주에 있을때 다녔던 교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 났습니다.
“아직 호주는 (브리스번은) 그렇게까지 한국인들이 많지 않은 곳이니까 너만 마음을 먹는다면 여기와서 살수 있는 기회를 잡기에 좋은 곳이다. 여기서 공부해라. 미래를 준비해봐라. 그러면 네 인생이 달라질꺼다.”
‘그래, 호주로 돌아가자. 내가 있을곳은 호주였나보다.’
호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학생비자로 왔습니다.
그래, 해보자와 실제로 와서 하는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학생비자를 받아서 해보자, 살아보자 하는것과 진짜 학생으로 공부하며 살아가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정말로 공부를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리를 못잡아 쫓기는 심정으로 학생비자를 받아 온 것이기에 공부가 들어올 리가 없었고 이전에 10개월동안 있으며 회화실력이나마 어느정도 다져놓은것도 아니었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힘들었을 과정도 아닌데 너무나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졌고 결국 얼마되지 않아 학교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한국도 갈수 없고, 호주도 더 있을수 없고,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고민하다가 미국에 계신 친척집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미국에 가보자. 큰 물은 다를거야.
친척이 저를 먹여살려야 하는 의무를 띄고 미국에 이민 간것은 아니었습니다.
친척집에 갔지만 더 먼 친척, 저희 어머니도 “그런 친척동생이 있긴 있었던것 같다”라고 하실 정도의 먼 친척집이 막 미국에 이민와서 시작하신 중국요리 식당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살면서 해본것은 많기에 평생 건축일만 하시다가 자식들 때문에 미국 오셔서 식당을 시작한 그 먼 친척분의 일을 좀 도우라는 미명하에 보내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루에 14시간씩 일했습니다. 주방이며 홀이며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14시간중 밥먹는 시간 포함해서 딱 30분 쉴수 있었습니다.
13시간 30분은 앉지않고, 쉬지않고 일해야 했습니다.
닭띠 분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그때 그 시절 이후로 제가 닭띠를 별로 안좋아합니다.
그 먼 친척분이 닭띠였는데 (물론 띠가 문제는 아니겠지만) 본인도 쉬지 않고 일했지만 남도 쉬는 꼴을 못봤습니다.
본인은 손님없을때 창고에 들어가 누워서 잠을 잘 망정 제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기가 막히게 아시고 불러서 일하라고 다그쳤습니다.
3분정도 앉아있으면 바로 불러서 쓰지 않는 그릇 때라도 벗기라고 일을 시켰습니다.
집에서 잠은 그 집에 7살짜리 아들과 4살짜리 딸이 쓰는 작은 어린이 이층침대의 일층을 빌려서 잤는데 발을 다 뻗을수가 없었고 앉으면 윗 침대에 머리가 닿는 곳에서 잤습니다.
매일밤 혼자 창문으로 달을 보며 일기를 쓰고, 윗 침대의 그 집 아들이 깰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니 손전등으로 갖고 갔던 손바닥만한 성경책 들여다보며 위안을 삼아 살았었습니다.
가게에서 일이 마치는 늦은 밤이 되면 부인과 자녀들 네명이 가게로 와서 그날의 수입을 계산하면서 아이들은 음료수 빼먹으로 뛰어놀고 부인은 함께 돈 세며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그동안 저는 혼자서 주방과 홀을 청소했습니다.
중국식 식당이기에 닭요리가 많았고 닭을 직접 손질해서 쓰기에 닭 찌꺼기며 갖은 음식 쓰레기들이 큰 파란색 원통형 쓰레기통에 두통 가득히 매일밤 나왔습니다.
건물뒤에 큰 쓰레기 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청소의 마지막 단계로 파란 큰 음식물 쓰레기통을 그 쓰레기차로 가져다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두웠고 또 미국사람 쓰레기차여서인지 모르지만 쓰레기 차 높이도 높아서 그 무거운 음식물 쓰레기통을 머리위까지 혼자 들어올려서 버려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유난히 바뻤던 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서 쓰레기를 버리러 갔습니다.
특히 더 무거웠던 그 음식물 쓰레기를 혼자서 죽을힘을 다해 머리위로 들어올렸을때 닭찌꺼기 국물이 새며 그 오물에 손이 미끄러지면서 쓰레기통 한통을 머리부터 거꾸로 완전히 뒤집어 썼습니다.
닭껍질, 뼈다귀, 피, 육수, 음식쓰레기, 기타 별별 더러운 오물로 범벅이 된 상태로 쓰레기 차 옆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몇일후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전화를 걸었는데 (인터넷은 그 집에 없었고 전화는 눈치보여서 쓰기 어려웠고 부모님도 이번에 가면 뼈를 묻을 각오를 하라고 하셨기에 감히 자주 걸수 없었습니다) 이틀내내 아무도 받질 않는것이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걱정이 되어서 아버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음성이 나오기 직전에 아버님이 받으셨습니다.
“아버지, 저예요. 왜 그렇게 전화를 안받으셨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버님이 한참을 말없이 전화를 들고 계시더니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사실은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지금 발인을 막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이래뵈도 집안에서 장손입니다. 장손이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지켜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를 끔찍이도 아껴주셨던 할아버지셨는데.
왜 알려주지 않으셨느냐니까 아버지 대답이 더 기가 막혔습니다.
“그 와중에도 전가족 회의를 했다. 너를 부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결론은 부르지 말자였다. 이유는 이번에 또 이렇게 들어와 버리면 네 인생 말 그대로 ‘조질것’ 같다는게 이유였다. 그래서 안 불렀다. 그렇게 알아라.”
참 비참했습니다. 정말 사는게 싫었습니다.
그때쯤 친척분께서 제안을 하나 해 오셨습니다.
학생비자는 비자인데 학교는 가지 않아도 되는 비자가 있다. 그 비자 받고 일만 열심히 몇 년 하면 여기서 영주권 받고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일 자체에 지쳐 있었고 할아버지 돌아가신데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귀에 들어올리 없었고 한국에 가서 포장마차라도 해서 정말 제대로 다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 처음 호주 갔다가 한국 갔을때는 식구들이 다 공항에 꽃다발 들고 나왔습니다.
두 번째 호주에서 실패하고 한국 들어 갔을때는 어머니 혼자 꽃한송이 들고 나오셨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갔을때는 어머니 혼자서도 마지 못해 빈 손으로 나오신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물론 별반 달라진것 없이 저를 위해 누가 일자리 마련해서 기다리고 있는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이어른 애들 틈에서 하는게 부끄럽긴 했지만 아뭏튼 어느 회사 서류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고 몇 달 못되어 누군가의 소개로 다단계 업체를 알게 되어 다단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그래도 공짜로 일한것은 아니어서 조금 모아갖고 들어온 돈, 다단계로 날렸습니다.
그리곤 다시 또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이름도 없는 작은 초등학생 보습학원의 교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호주도 갔다왔고 미국도 좀 있었으면 영어선생님을 했어야 체면이 서는데 한문선생님 했습니다.
책에 나온 획 쓰는 순서와 다르다고 아이들에게 얼마나 망신을 당했었는지...
이름없는 작은 학원이어서 곧 망했고 거기서 나와야 했던 저는 이번엔 보험회사를 두드렸습니다.
신입사원 교육을 받던 한달동안 그래도 열심히 해서 최우수교육생 상까지 받고 시작했습니다.
유난히 저를 싫어하던 보험회사 윗 사람이 ‘최우수교육생 치고 실제로 제대로 하는 놈 못봤다’는 악담이 효력을 발휘했는데 저의 실적은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다단계와 달리 열심히만 했으면 정당한 보수를 상당히 받을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개척 나가기 두렵고, 소개 해달라고 부탁하기 어색하고 상품 권할 용기 없다는 핑계로 열심히 하지 않다가 끝내는 빚만 지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채로 그곳에서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총체적으로 엉망이었습니다. 총체적 부실, 총체적 파산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삶은 ‘차선’이 있었고 그 차선들로 늘 옮겨다니던 삶이었습니다.
이게 아니것 같으면 저것으로, 저게 아닌것 같으면 또 이것으로.
그런데 이번엔 그 ‘차선’이 없었습니다. 도피처가 더 이상 없더라는 말입니다.
어디 작은 돌부리라도 있어야 발을 옮길텐데 차올라오는 물을 피할 차선의 징검다리가 없었습니다.
갈데까지 간것이었고 그때쯤 되니까 자살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실행을 얼마 앞둔 어느날, 예전에 호주에서 다녔던 그 교회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하시는데 한번 보자고 하셨습니다.
만나더니 앞뒤없이 대뜸 “너 사는거 어렵지?” 그러셨습니다.
그래도 은사인 분에게 현실을 그대로 말씀드릴수는 없어서 잘산다고 했는데도 부득불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랬구요.
그러더니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더 기회를 줄게. 호주로 와라. 와서 나 도와서 함께 일해봐라. 네게 마지막 기회가 될수 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연락해.”
제겐 기적이었고 구세주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호주로 다시 오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글에서 제가 청년들을 섬기고 있다는 말은 제가 무슨 전도사님이나, 목사님같은 일을 한다는게 아니었고 교회 청소로, 봉고차 운전사로 일하며 청년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에게 저의 지금까지 써내려온것과 같은 삶을 이야기 해주며 나는 이렇게 시간을 잘못 사용해서 인생을 낭비했으니 여러분은 그러지 마십사 하는 말을 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의지가 약하고 인생의 목적도 없고 게으르고 나태한 성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호주에서의 첫 10개월, 워홀 비자로 와서 정말 의미있게 시간을 사용했어야 할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때의 여파가 그 이후 5년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고 지금 이순간까지도 영향을 미치며 사랑하는 저의 식구, 가족들에게까지 고통을 당하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을 떠나 외국에 나온다는 것은 언뜻 별것 아닌것 같은, 한순간의 경험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어떤면에서 그것은 모험을 넘어서서 도박을 벌인것이나 마찬가지일수 있습니다.
무언가 나아져서 돌아가지 않고서는 떠나기 전보다 더 못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이유는 내가 그게 무엇이든 부족한것을 느꼈고 한국에서 잘 안풀렸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호주로 떠나오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고서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여기에 남아서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하게 붕 떠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어공부 절대하지 말라는 말도 정말 영어공부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호주 영어가 형편없다는 말도 아니었고 미국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었고, 호주에 오는 정말 이유는 왜 내가 한국에서 어려웠고 힘들었고 더 열심히 잘 살아보지 못했는가 깊이 돌아보면서 나의 약점, 나를 발목 잡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치료하고 돌아가서 더 자신감을 얻어 열심히 살아갈수 있게 하는데에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사회는 너무 바빠서 나를 돌아볼, 깊이 성찰해 볼 시간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시간이 낭비갖고 그동안 달려 나가는것 같은 친구들을 돌아보면서 불안해 하기 때문에 그럴수가 없지만 일단 호주에 나오면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니고 잔소리 하는 것도 아니고 해야만 하는것이 있는것도 아니기에 좀 더 자유롭게 자기자신에게 집중할수 있습니다.
그 소중한 기회를, 어쩌면 평생 한번밖에 없을수 있는, 잘 활용해서 나를 돌아보고 나의 부족한 점-실력이나 학력이 아닌-을, 약점을 명확히 바라보며 두 번째 글에서 설명했듯이 미쳐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다양한 길들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치유하고 채우고 다지고 강하게 만든후 혹시라도 그런 와중에 내가 정말 가야할 길, 인생의 방향, 목적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그곳으로 발을 옮겨 남은 삶을 의미있게 전력질주 할수 있는 그런 모든 것의 가능성으로 호주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에 영어학원이 없어서가 아니었고 여기서 쓰고 가는 돈만큼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호주가 별천지여서도 아닙니다.
내 근본적 문제를 돌아볼 시간도, 고칠 기회도 없었고 남들 뛰니까 나도 그냥 어리버리하게 뛰기만 뛰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며 살아왔던 삶이었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나란 사람은 정말 어떤 사람인가’를 발견하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내가 태어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나의 가장 약한 점을 자신감과 경험등으로 보완’ 시킨다면 그 이후로 그 사람의 삶은 크게 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론입니다. 검증된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하지 못했고 아직 인생을 다 살아본게 아니기 때문에 효력이 있는건지, 정말 그렇게 되긴 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답이다. 이게 진짜다. 이게 길이다. 이대로만 하면 다 된다’는 식으로 ‘정답’을 제시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지만 ‘이건 길이 아니더라. 이렇게 하면 안된다. 이것만큼은 피해야 한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표시해 주는것도 또 한가지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누군가를 위해서 말입니다.
호주에 'Wrong way. Go back'이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빨간색 큰 간판으로 보기도 흉물스럽고 ‘그걸 누가 몰라? 누가 그 길로 가야 바보야?’ 하는 표지판이지만 그게 없으면 큰 사고를 불러 일으킬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빨간 표지판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저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더 이상 내가 잘되어 보자고, 꼬인 인생을 풀어서 ‘성공’해보자고 생각하는 대신, 빨간 표지판이 되어서 ‘이 길은 아니다’라고 보여주어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언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말입니다.
제가 이끌어 줄수는 없습니다. 결국 저는 리더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가본 길은 옳은 길들은 아니었기에 그 길로 이끌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딘가 한자리에 굳건히 서서 ‘Wrong way. Go back’하고 말해줄 수는 있겠지요.
이 글로 그런 마음으로, 호주로 오기전에 한번쯤 마음을 다시 다지고 목적을 확실하게 하고 오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기로 한것입니다.
단 한명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전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