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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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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갑자원 경기를 본 적이 있다.
패배한 후에 갑자원 구장의 검은 흙을 담는 선수들의 눈에서는
그야말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우리에겐 고연전도 흥분의 도가니지만, 이것이야 말로 청춘 로망의 극치.
최소 20배정도 강렬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한번 꼭 다녀와보고 싶은 곳.
청춘을 느끼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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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갑자원이란 무엇인가?

일본 만화를 접하고, 서서히 문리가 트이면서부터 필자의 머리 한 가운데에서 맴돌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도대체 갑자원이 뭐하는 거 길래 저 난리지?' 라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우리나라의 청룡기나 백호기, 봉황대기 같은 고등학교 야구대회인데, 일본 만화나 만화영화에서 등장하는 갑자원은 어떤 광풍이 몰아치는 청춘의 열기 그 자체였다.

필자의 아버지가 '역전의 명수 선린상고' 를 얘기하며 70 년대에 한국의 고교야구가 날렸었다는 말을 들어도 시큰둥하던 때였기에 그다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늘상 필자의 기억 속에 있는 고교야구란 것은 썰렁한 동대문운동장과 하일성씨 그리고 심판들의 부정심판 등등이 다였기에 과연 저렇게 열광하는 고교야구 만화가 존재할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 법도 했다. 문제는 한국의 만화에도 갑자원은 언제나 '흥행대박' 이었다. 이현세씨의 <머나먼 제국>이란 작품에서도 주인공은 갑자원 우승을 한 문무겸비의 남자로 나오게 된다.

이런 의구심은 몇 개의 갑자원 야구대회 만화를 보며 점점 증폭 되었다가 1993 년 8 월...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수학능력시험 2 번 실시의 시기에 걸쳐서 해결되었다. 당시 본 필자는 수학능력시험에는 전혀 뜻이 없었고, 오로지 한 일이란 게 일본 위성방송을 보며 시간을 소일하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담임선생까지도 날 포기하고, 일본 수입서점에 가서 뉴타입 사오겠다는 말을 듣고는 선선히 내보내셨을까? 그 당시 본 필자는 대학이란 것에 그닥 뜻을 두지 않고 있었던 시기였고, 야간자율학습과 보충수업도 모잘라 방학기간까지 학교를 나오게 했던 이 입시지옥에 치를 떨던 시기였다. 원체 공부와는 거리가 있는 인생이었지만, 그때는 정도가 좀 더 심했다. 어쨌든 그렇게 집안에 틀어박혀 NHK 를 보던 필자, 지금도 여름방학만 되면 만화영화 특선 시리즈와 영화특선 시리즈 등 꽤 볼만한 프로를 방송하고 있는 NHK 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러니까 그 뒹굴거리던 고 3 여름방학(?)의 한 가운데 NHK 방송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필자는 이색적인 일본 문화에 묘한 감흥을 느끼다가 결국 못볼 걸 보게 된다. 바로 제 75 회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를 보게 된 것이다. <터치>나 다른 일본 야구만화를 보며, 반신반의 했던 사실들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갑자원 대회 열리기 며칠 전인가? 이미 갑자원 구장에 몰려든 수많은 인파들이 서로 자신의 고향팀과 모교를 응원하느라 난리를 쳤고, 갑자원 근처의 '우승라면집' 과 '우승덮밥집' 에선 서로 자기네 돈부리와 라멘을 먹으면 우승할 수 있다며 라면과 덮밥을 내밀고 있었다. 촌티 나는 TV 세트장에 앉아 화기애애한 웃음을 지으며 조추첨을 하던 필자와 비슷한 또래의 고교 야구 선수들. 이때까지는 바다 건너 한국의 내 또래 학생들의 모습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대회 개막일 조 추첨 때의 그 화기애애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이제 분위기는 열광 그 자체였다.

하이라이트는 그 입장식이었다. 49 개교란 자막이 나오고 나서 마치 2 차 대전때의 학도병처럼 로봇과 같이 뻣뻣하게 무릎과 팔을 직각으로 꺽으며 입장하는 모습. 머리는 완전 빡빡 밀어서 만화의 그것과는 좀 다르단 걸 알게 되었지만, 일단 그네들의 표정엔 '비장미' 와 '결연함' 이 넘쳐 흘렀다. 그리고 49 개교를 둘러싼 스타디움 안의 열기들... 5 만 8 천석이 꽉 미어터져서 이 49 개교의 선수들을 바라보는 그 모습이란, 아니 일본 열도의 모든 이들이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실제로 거기 나온 응원석의 여학생들이 이 소년 야구 선수들에게 연정과 애모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말이다. 한 때 갑자원 배경 만화에서 나오는 락커룸 안에서의 러브씬이 거짓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선수 선서와 개회사 그리고 긴 사이렌과 함께 시작되는 갑자원의 제 1 시합, 정말 그들은 미친 듯이 야구를 했었다. 말 그대로 그해 여름에 자신의 청춘을 불태웠다. 치고, 던지고, 구르고, 달리고, 갑자원의 그 고운 검은색 점토흙에 자신을 내맡긴 채 그들은 야구를 했었다. 내가 보기엔 별반 우리네 고교야구 수준과 다를 거 같지 않았다. 직구 구속이 130 킬로를 넘는 걸 보기 힘들었고, 무사 1 루면 여지없이 나오는 번트 사인에, 몇 개의 커브와 포크볼, 슬라이더 정도가 구질의 전부였었다(낙차는 컸지만, 속도는 여지없이 고교 야구의 평균이었다). 타자도 썩 잘 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가 달랐다. 그렇다. 그들은 열정을 가지고 달렸던 것이다. 자신들의 온 힘을 다해 야구를 했었고, 결과는 그 다음이었다. 진 팀은 울면서 갑자원의 흙을 '모래주머니' 에 담아갔고, 이긴 팀은 자기들을 응원한 모교가 있는 펜스로 달려가 교가를 불렀다. 교가를 부르던 그들의 얼굴에선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뿌듯함이 느껴졌었다. 그렇게 그들은 야구를 했었고, 난 그해 여름에 있었던 갑자원 야구대회 전 시합을 다 봤었다.

그 당시 내가 느꼈던 문화적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분명 나와 같은 고 3 인데, 난 수능이란 입시괴물에 쩔어서 갈피를 못잡고 있는 상황에서 바다 건너 일본의 고 3 은 말 그대로 '청춘을 불태우고' 있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동경심이 가슴 속 깊숙한 심연에서부터 피어 올랐다. 더 대단한 건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일본인들의 시선이었다. 당장 야구장에 모인 모교 학생들, 선후배는 물론이거니와 갑자원을 중계하는 NHK 의 모습이란... 정말 NHK 는 아침부터 시작해 오후들어 모든 게임이 끝날 때까지 전 게임을 쉬지 않고 중계했다. 이 짓을 대회 끝날 때까지 했던 것이다. 더 대단한 건 취재 열기인데, 이긴 팀이든 진 팀이든 장비를 챙겨 들고 락커룸으로 통하는 복도를 지나 기자회견장(?)으로 향하는데, 복도 좌우를 빽빽이 메운 기자들의 플레쉬 터지는 소리와 기자회견장으로 보이는 그 곳에서 투수는 투수대로, 그 날의 수훈선수는 수훈선수대로, 감독은 감독대로 전부 기자들에게 포위되어 인터뷰를 해야 했던 것이다. 진 팀 역시 인터뷰를 하는데, 그 열기란 것이 웬만한 프로스포츠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후에 이 갑자원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이 갑자원의 규모와 수준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일단 갑자원, 그러니까 고시엔이라 불리는 유래에서부터 시작해야겠는데, 효고(兵庫)현 니시미야(西宮)시의 오사카(大阪)만 연안에 5 만 8 천 명을 수용하는 야구장 '고시엔(甲子園)' 이 있다(야구장 이름에서 갑자원이 나온 것이다. 야구장 이름이 갑자원인 건 甲子年에 야구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센트럴리그 한신(阪神) 타이거즈의 홈구장이기도 하지만 매년 여름에 열리는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의 본선 무대로서 더욱 유명해졌다. 한국에 소개된 <폭렬 갑자원>이란 만화에서 매니저가 '고시엔에 가고 싶다!!' 라고 말하자, 주변에서 한신 타이거즈 팬클럽에 들으라고 말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일단 이 녀석은 1924 년 완공 직후 10 회 대회가 여기서 열리면서 정식 명칭인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 대회' 라는 명칭은 밀려나고, '고시엔 대회' 라는 명칭이 자리잡게 된다.

이 대회의 역사란 것이 '일본 야구의 역사' 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1915 년 1 회 대회가 열렸으니, 거의 100 년에 가까운 역사가 된다. 이 갑자원 시스템이란 건 '연중 쉬지 않고 이어지는 야구경기'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겠는데, <H2>를 보신 독자라면 갑자원 야구대회가 봄에도 한 번 있고, 여름에도 한 번 있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뭐 봄 경기가 여름 경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두 경기가 일본 고교 야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대단한 이벤트임에도 틀림없다. 어쨌든 이 두 개의 고시엔은 3,4 월에 치러지는 '봄 고시엔' 혹은 '선발(選拔) 고시엔(선발의 일본식 발음 센바츠를 따라 센바츠 고시엔이라고 한다)' 과 7,8 월에 열리는 본격적인 청춘의 대로망 '여름 고시엔' 으로 나뉘어진다. 카와구치 카이지의 <배터리> 란 작품을 보면 '갑자원 춘하제패 실패' 라며 흥분하는 모습이 바로 이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고시엔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서 말해봐야 겠는데, 1999 년 현재 일본에 등록된 고교 야구팀의 숫자만 4,200 여 개다 이 4,200 여 개의 팀은 전국 49 개 권역으로 나뉘어져 자기네 권역 안에서 예선을 치루게 되는데, 팀마다 최소 7 번의 예선을 거쳐 갑자원 구장에 발을 내딛을수 있는 숫자가 바로 49 개교다.

이미 갑자원 대회에 진출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들은 그 지방의 '영웅' 이 될 만한 것이다. 우리나라 고교 야구대회 중 유일하게 '예선전' 이 없어 그 대회규모가 제일 큰 봉황대기의 출전 학교수가 50 개교를 겨우겨우 넘긴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지 않는가? 더 대단한 건 이 49 개교 팀 중에서 왕중왕을 가리는 갑자원 본선인데, 49 개팀이 6 번의 시합을 거치는 동안 하나 둘 떨어져 나가 종국에 가서 갑자원 우승을 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신화' 의 한 장면으로 기록되는 것이다(쉬지 않고 계속 던지고 뛰고 하는 토너먼트 방식이다. 지면 짐싸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니 매일매일의 승부가 그야말로 전투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NHK 가 정규방송 중에서 뉴스만 제외한 모든 프로를 올스톱시킨 다음에 이 갑자원대회의 전경기를 생중계 하는 것이다.

<H2>나 <4 번 타자 왕종훈>, <터치>를 보면, 갑자원 구장 안의 매점이나 숙소에서 '모래 주머니' 란 걸 파는 장면이 나온다. 또 경기에 진 팀의 경우 인사를 마치자 마자 그라운드에 주저 앉아 열심히 갑자원의 흙을 퍼 담는 장면이 보여지는데, 본 필자 역시 이 장면을 TV 에서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TV 를 통해서지만 이 모습을 보고 나선 할 말을 잃었다. 실제로 이런 '흙 담아가기' 의 전통은 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 1949 년 우승후보로 꼽혔던 기타규슈(北九州)시의 고쿠라기타(小倉北) 고교가 준준결승에서 패퇴할 당시 투수가 슬그머니 흙 한 줌을 주머니에 담는 장면이 보도된 후 갑자원의 전통이 되어 버렸다.

이런 전통이 '모래 주머니' 에까지 이어지고, '절대 지지 않는다!!' 라는 신념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겠다며, 절대 모래주머니를 사지 않는 선수도 있고, 모래주머니를 준비 못해 양말을 벗어 흙을 담아가는 모습 등등 재미있는 장면도 연출되곤 한다. 실제로 이 흑토를 퍼가는 걸 보면, 한신 타이거즈의 배려가 느껴지는 대목인데, 갑자원이 열리는 대회 기간 동안 한신은 홈구장을 버려 두고 이리저리 어웨이 경기를 뛰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열혈 청춘의 로망' 을 위해서 이들이 갑자원의 상징이랄 수 있는 이 흑토를 퍼가는 걸 허락해 준 것이다.

실제 갑자원 대회가 끝나고 나서 이 흑토를 다시 깔고, 운동장 보수를 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도 한신 타이거즈 측은 열혈 청춘의 로망을 위해 기꺼이 이 갑자원 부대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무서운 것이 이런 비용 이상의 수익을 뽑아내는 것이 바로 일본 야구계란 것이다. 생각해보라 4,200 여 개 학교의 야구부 부원수가 얼마나 될까? 10명씩만 잡아도 4 만 2 천 명이 넘는다. 이들 중 프로가 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들은 다시 사회로 나와 사회인 야구를 하던가, 옛날 옛적 자신이 고교야구를 했던 추억을 반추하며 일본야구의 팬이 되는 것이었다. 일본은 1 년마다 최소 4 만명이 넘는 열혈 야구팬을 양산해 내는 것이다.

한 가지 좀 의외의 기록도 있긴 있는데, 바로 바다 건너 한국도 이 갑자원과 인연 아닌 인연을 맺었던 적이 있다는 것인데, 2000 년 시드니 올림픽 때 한국 타선과 한 바탕 승부를 벌였던 일본의 괴물투수 마쓰자카(松坂大輔)의 경우도 2 년 전인 1998 년 150 킬로미터를 넘나드는 강속구로 봄, 여름 고시엔을 제패 요코하마高를 일약 그해 가장 주목받는 학교로 만들어 버렸다. 2003 년 메이저리그 시즌 초반에 시카고 컵스의 최희섭과 곧잘 비교되었던 괴물 마쓰이 히데키(松井秀喜) 역시 92 년 여름 갑자원에서 5 연타석 고의사구란 신기록을 만들어 내며 갑자원의 신화를 다시 썼었다.

이외에도 박찬호와 한솥밥을 먹었던 노모나, 시애틀의 이치로 등등 웬만한 야구 선수들의 약력에는 갑자원에 관한 기록이 한줄씩 올라가 있는데, 한국과의 이런 인연 아닌 인연보다 조금 더 아픈 기억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 시절 그네들 기준으로 따져보면 조선 역시 일본의 한 영토였기에, 조선의 야구팀도 갑자원에 출전하게 된다. 지금도 낯익은 부산상고, 선린상고, 휘문고보 등이 조선지역 예선을 거쳐 갑자원에 나간 기록도 있다. 씁쓸한 역사의 기록은 야구에서도 이렇게 나타나는 것인가 보다(만약 YMCA 야구단처럼 한 번 야구로 일본은 평정했다면 이 역시 재미있을 듯 싶다).


<딴지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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