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에 팔아먹은 행복
휴대전화기를 또 잃어버렸다. 술만 좀 마셨다 하면 그 놈의 조그마한 물건이 주머니를 달아나는 데는, 정말 속수무책이다. 그 육시랄 휴대전화기에 내 보잘 것 없는 인생이 매어있는 게 분명한 것은, 아침에 눈을 반쯤 뜨자마자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전화기!”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는 것을 볼 때이다.
수학능력시험 치를 날 늦잠 잔 녀석처럼 벌떡 일어났다. 바지 주머니와 가방을 몽땅 뒤져도 그 손바닥 반만한 잘난 놈이 안 나타났다. 부랴부랴 집 전화기(오, 집 전화기는 얼마나 충성스러운가. 그 커다란 덩치를 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매고 얌전히 앉아있다)를 들어 내 휴대전화기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내 집 전화기로 내 전화기에 전화를 거는 이 우스꽝스러운 몸부림에도 그 놈의 작은 전화기 속의 여자는 낭랑한 목소리로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한 뒤 "연결된 뒤에는 요금이 부과되오니 원하지 않으시면 끊으시기 바랍니다"하고 친절하게 안내했다. 이번엔 건전지 눈금 하나만 남은 상태에서 잃어버려, 아예 누군가 내 전화기를 들고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기회까지 스스로 포기한 셈이 되었다.
잃어버린 휴대폰으로 대공황은 시작되고
바야흐로 대공황(大恐慌)이 시작되었다. 우선 나에게 더 이상 긴박할 수 없는 전화들이 쇄도하고 있는데 하나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일종의 정신강박증적 착란 현상이다. 회사 일이 잘못되어 부장이 온갖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전화할 것 같기도 하고, 가장 친한 고교 동창이 갑자기 부고(訃告)를 알릴 것 같기도 하다. 한강변에 아파트 한 채를 거저 나눠주는 500만대 1 사은행사에 내가 당첨됐고, 그 통보시한이 오늘까지인 것 같다는 무시무시한 착각에 시달린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하며 한 숨 돌리면 두번째 패닉이 밀려온다. 그 전화기 속에 담겨있는 300명 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 이제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화를 한다는 말인가. 심지어 어젯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 참혹한 사태가 닥치도록 도와준 친구놈의 전화번호조차 그 전화기 속에 있고, 그 그 전화기 속에 있다. 그 두 녀석의 전화번호를 나란히 알고 있는 녀석의 전화번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삼 세 번의 충격 중 마지막 것은 어찌해서 새로 전화기를 마련한다 해도, 언제 그 많은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다시 입력할 것이며 그래서 어느 세월에 정상적인 인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허탈감이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저주, 저주, 저주
온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어떤 전화 연락도 받을 수 없으며 어떤 전화번호도 돌릴 수 없고, 새 전화기를 사서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입력해나가야 하는 냉정하고도 처절한 현실감각을 되찾는다.
그렇게 현실감각을 가까스로 되찾은 뒤에야 비로소 전화기를 돌려주지 않고 있는 '그 자'에 대해 저주를 퍼붓기 시작한다. 그게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젯밤 집에 돌아오며 탔던 택시의 기사일 수도, 어디선가 길에 떨어진 것을 주워든 선량한 시민일 수도 있다.
건전지가 다 닳은 휴대전화기를 주웠으면,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일단 충전을 한 뒤 전화번호부만 뒤져도 얼마든지 '집', '처가', '회사' 같은 전화번호를 찾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아니, '처가'는 좀 피해주면 훨씬 더 고맙겠다. "한 서방, 전화기 주웠다는 전화가 왔네" 하는 장모님의 애정 어린 목소리는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아무런 연락이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극악무도한 습득자는 분실 휴대전화기를 싸게 사다가 내부구조를 바꿔 새 전화기로 탈바꿈시킨 뒤 몇 만원 더 얹어서 파는, 그런 업자와 결탁했음이 분명하다.
내 휴대전화 분실사건을 심드렁하게 듣는 회사 동료들은 얄밉게도 그런 업자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LPG 주유소에도 있고 공항에도 많대. 한 대에 3만원인가 4만원 주고 산다나봐. 그리고는 10만원쯤에 파는 거지. 그래, 뭐 하러 귀찮게 돌려주겠어. 돌려줘봐야 사례로 얼마나 받겠느냐구. 선행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아니고는 누가 그 짓을 하겠냐. 하여튼 이 나라는 안 돼. 고작 몇 만원 거저 얻으려고 한 사람이 수 년 간 모은 인적(人的) 데이터베이스를 팔아먹는단 말야. 그리고 그런 불법 거래가 백주에 벌어지는데 대관절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는 경찰들은 과연 무엇하는 자들인 거야.
느리고 안전한 행복을 그리워하며
제 좋아 마신 술에 취해 어딘가에 전화기를 흘리고는 불특정다수에서 시작해 민중의 지팡이까지 아작아작 씹어댄다. 그리고는 결국, 에이, 중고 전화기 어디서 좀 싸게 살 수 없냐, 로 대화는 끝을 맺는다.
헨리 소로우의 '월든'부터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서 나온 책 '선이골 외딴집 일곱식구 이야기'를 읽고 휴대전화에 인터넷에 하드 디스크에 이리저리 얽매인 '네트워크 인생'이 얼마나 불행한가 하고 생각했다.
전기도 전화도 인터넷도 없는 자연 속에서 일부러 불편하고 느린 삶을 사는 이들이 누리는 행복과, 초고속 브로드밴드와 인텔 CPU와 200메가픽셀 카메라가 달린 휴대전화기와 쌍방향 위성디지털 TV에 파묻혀 사는 이들의 행복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바로 '독립적'이냐, '의존적'이냐 하는 것이다.
느리고 불편함에서 얻는 행복은 천재지변 말고는 훼손될 가능성이 거의 없으나, 편리하고 빠른 것에서 비롯된 행복은 '단전(斷電)'이나 '고장' 또는 휴대전화처럼 '분실' 같은 아주 간단한 이유로 완전히 망가질 수 있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버튼이나 마우스를 눌러 하드디스크를 돌려야 비로소 행복의 시동이 걸리는 이 서울의 삶이 하릴없이 밉살스러운 것이다.
한현우|조선일보 문화부기자
휴대전화기를 또 잃어버렸다. 술만 좀 마셨다 하면 그 놈의 조그마한 물건이 주머니를 달아나는 데는, 정말 속수무책이다. 그 육시랄 휴대전화기에 내 보잘 것 없는 인생이 매어있는 게 분명한 것은, 아침에 눈을 반쯤 뜨자마자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전화기!”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는 것을 볼 때이다.
수학능력시험 치를 날 늦잠 잔 녀석처럼 벌떡 일어났다. 바지 주머니와 가방을 몽땅 뒤져도 그 손바닥 반만한 잘난 놈이 안 나타났다. 부랴부랴 집 전화기(오, 집 전화기는 얼마나 충성스러운가. 그 커다란 덩치를 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매고 얌전히 앉아있다)를 들어 내 휴대전화기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내 집 전화기로 내 전화기에 전화를 거는 이 우스꽝스러운 몸부림에도 그 놈의 작은 전화기 속의 여자는 낭랑한 목소리로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한 뒤 "연결된 뒤에는 요금이 부과되오니 원하지 않으시면 끊으시기 바랍니다"하고 친절하게 안내했다. 이번엔 건전지 눈금 하나만 남은 상태에서 잃어버려, 아예 누군가 내 전화기를 들고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기회까지 스스로 포기한 셈이 되었다.
잃어버린 휴대폰으로 대공황은 시작되고
바야흐로 대공황(大恐慌)이 시작되었다. 우선 나에게 더 이상 긴박할 수 없는 전화들이 쇄도하고 있는데 하나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일종의 정신강박증적 착란 현상이다. 회사 일이 잘못되어 부장이 온갖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전화할 것 같기도 하고, 가장 친한 고교 동창이 갑자기 부고(訃告)를 알릴 것 같기도 하다. 한강변에 아파트 한 채를 거저 나눠주는 500만대 1 사은행사에 내가 당첨됐고, 그 통보시한이 오늘까지인 것 같다는 무시무시한 착각에 시달린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하며 한 숨 돌리면 두번째 패닉이 밀려온다. 그 전화기 속에 담겨있는 300명 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 이제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화를 한다는 말인가. 심지어 어젯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 참혹한 사태가 닥치도록 도와준 친구놈의 전화번호조차 그 전화기 속에 있고, 그 그 전화기 속에 있다. 그 두 녀석의 전화번호를 나란히 알고 있는 녀석의 전화번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삼 세 번의 충격 중 마지막 것은 어찌해서 새로 전화기를 마련한다 해도, 언제 그 많은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다시 입력할 것이며 그래서 어느 세월에 정상적인 인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허탈감이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저주, 저주, 저주
온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어떤 전화 연락도 받을 수 없으며 어떤 전화번호도 돌릴 수 없고, 새 전화기를 사서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입력해나가야 하는 냉정하고도 처절한 현실감각을 되찾는다.
그렇게 현실감각을 가까스로 되찾은 뒤에야 비로소 전화기를 돌려주지 않고 있는 '그 자'에 대해 저주를 퍼붓기 시작한다. 그게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젯밤 집에 돌아오며 탔던 택시의 기사일 수도, 어디선가 길에 떨어진 것을 주워든 선량한 시민일 수도 있다.
건전지가 다 닳은 휴대전화기를 주웠으면,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일단 충전을 한 뒤 전화번호부만 뒤져도 얼마든지 '집', '처가', '회사' 같은 전화번호를 찾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아니, '처가'는 좀 피해주면 훨씬 더 고맙겠다. "한 서방, 전화기 주웠다는 전화가 왔네" 하는 장모님의 애정 어린 목소리는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아무런 연락이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극악무도한 습득자는 분실 휴대전화기를 싸게 사다가 내부구조를 바꿔 새 전화기로 탈바꿈시킨 뒤 몇 만원 더 얹어서 파는, 그런 업자와 결탁했음이 분명하다.
내 휴대전화 분실사건을 심드렁하게 듣는 회사 동료들은 얄밉게도 그런 업자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LPG 주유소에도 있고 공항에도 많대. 한 대에 3만원인가 4만원 주고 산다나봐. 그리고는 10만원쯤에 파는 거지. 그래, 뭐 하러 귀찮게 돌려주겠어. 돌려줘봐야 사례로 얼마나 받겠느냐구. 선행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아니고는 누가 그 짓을 하겠냐. 하여튼 이 나라는 안 돼. 고작 몇 만원 거저 얻으려고 한 사람이 수 년 간 모은 인적(人的) 데이터베이스를 팔아먹는단 말야. 그리고 그런 불법 거래가 백주에 벌어지는데 대관절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는 경찰들은 과연 무엇하는 자들인 거야.
느리고 안전한 행복을 그리워하며
제 좋아 마신 술에 취해 어딘가에 전화기를 흘리고는 불특정다수에서 시작해 민중의 지팡이까지 아작아작 씹어댄다. 그리고는 결국, 에이, 중고 전화기 어디서 좀 싸게 살 수 없냐, 로 대화는 끝을 맺는다.
헨리 소로우의 '월든'부터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서 나온 책 '선이골 외딴집 일곱식구 이야기'를 읽고 휴대전화에 인터넷에 하드 디스크에 이리저리 얽매인 '네트워크 인생'이 얼마나 불행한가 하고 생각했다.
전기도 전화도 인터넷도 없는 자연 속에서 일부러 불편하고 느린 삶을 사는 이들이 누리는 행복과, 초고속 브로드밴드와 인텔 CPU와 200메가픽셀 카메라가 달린 휴대전화기와 쌍방향 위성디지털 TV에 파묻혀 사는 이들의 행복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바로 '독립적'이냐, '의존적'이냐 하는 것이다.
느리고 불편함에서 얻는 행복은 천재지변 말고는 훼손될 가능성이 거의 없으나, 편리하고 빠른 것에서 비롯된 행복은 '단전(斷電)'이나 '고장' 또는 휴대전화처럼 '분실' 같은 아주 간단한 이유로 완전히 망가질 수 있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버튼이나 마우스를 눌러 하드디스크를 돌려야 비로소 행복의 시동이 걸리는 이 서울의 삶이 하릴없이 밉살스러운 것이다.
한현우|조선일보 문화부기자